[무화과나무 아래서](24) 감사의 적들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감사의 적들
인도 사람들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잘 안 한다고 한다. 여러 가지를 배려해도 아무 말 없이 지나가는 것이 대부분이란다. 그래서 인도에서 처음 사업하는 외국 기업들은 섭섭한 마음과 배신감까지 든다고 한다. 보너스를 두둑이 주어도 묵묵부답, 선물을 주어도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오랜 신분 제도인 카스트 때문에 아래 계급 사람들은 위 계급 사람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높은 계급 사람들은 낮은 계급 사람에게 감사를 표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이런 계급 차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므로, 특별히 감사할 일도 고마워할 일도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운명일 따름이다. 그런데 이런 인도인들처럼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우리다. 우리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잘못한다. 누가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 주어도, 고개만 까딱하는 경우가 많고, 좁은 길에서 길을 비켜주어도 감사하다는 말을 듣기 어렵다.
감사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 교만이다. 가장 적절한 표현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아쉬울 때와 내가 큰소리칠 때를 구분하는 것이다.
‘내가 누군데, 지금 좀 어렵지만, 너 따위에게 도움받을 사람은 아니야’
‘도와줬으면 조용히 사라지세요. 나도 조용히 넘어갈게요’ 같은 교만이다.
도움을 받으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적절한 자기합리화와 경제 논리로 대충 넘어가는 것이다. 위기만 극복하면 더 이상 비굴할 필요 없다는 마음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런 교만이 있는 자는 결코 감사할 수 없다.
미국 에드워드 스펜서의 이야기는 이런 교만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 1860년 9월 미국 미시간호에 여객선이 침몰해서 287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마침 그곳에 있던 스펜서는 땅에서 침몰 현장까지 800m 거리를 16차례나 오가면서 17명을 구조하였다. 그러나 후유증으로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서 살아야 했다. 세월이 지난 후,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던 여든 살 노인 스펜서에게 한 신문기자가 질문했다. ‘그 비극적인 밤 이후에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스펜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내가 구출해준 17명 가운데 나를 찾아오거나 내게 감사를 표한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17명이나 목숨을 구원받았는데, 아무도 감사를 표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왜 감사하러 오지 않았을까? 그때의 상처가 너무 커서, 아니면, 스펜서를 찾지 못해서? 아니다. 그날의 일이 지나가 버린 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 이상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구차하게 말할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같은 일이 있다. 누가복음 17장 11~19절에 나오는 10명의 문둥이 이야기다. 부정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마을에 살 수 없었던 문둥이들이 마을 밖에 모여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들이 사는 곳을 예수님이 지나간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외친다. 예수님도 이들을 고치신다. 과연 이들 10명 중에 몇 명이 예수님에게 돌아와 감사를 표했을까? 잘 아는 바와 같이, 오직 1명만 감사를 표했다. 9명의 유대인은 자취를 감추었다. 더는 문둥병자도 아니고, 새로운 사람으로 신분 세탁이 되었는데, 굳이 예수님을 만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불편한 과거는 오히려 덮어놓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다녀온 티 내서 무엇하겠는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다. 감추고 싶은 과거에서 자유롭고 싶은데, 자꾸 감사하는 것이 오히려 과거를 들추는 것 같아 숨기는 것이다. 이것은 교만이다. 죽어야 할 운명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온전히 감사할 수 있다. 그분이 아니면 죽은 존재이고, 그분이 아니면 절망 가운데 침몰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감사다. 구원이라는 선물만 기억하지 말고, 선물 주신 이를 바라보라. 선물만 기억하고 있다면, 나 자신은 선물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여겨서 감사는 사라진다.
또한, 비교의식이 감사를 방해한다. 남보다 조금 더 가졌으면 우쭐대고, 남보다 없으면 불행해하는 우리 마음이 감사의 적이다. 우쭐대느라 감사는 잊어버리고, 불행해하느라 감사 따위는 생각도 못 한다. 얼마 전 우리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실 아이들을 여럿 키우니 처음 겪는 일이 너무도 많다. 4남매의 맏이로 자란 아내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우리 때도 그랬어…” 이렇게 말하지만, 터울이 많은 누나 덕에, 거의 외아들로 자란 나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집에서 곧잘 벌어진다.
그중 하나가 ‘상장’ 해프닝이다. 큰딸이 상장을 여러 개 받아 온 때가 있었다. 물론 둘째 딸도 상장을 받아왔다. 그런데 외부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큰딸을 축하할 때 둘째 딸이 울기 시작했다.
“왜 1학년은 글짓기 대회를 안 하는 거야… 나도 나가면 상 받아 올 수 있는데… 엉엉”
둘째는 1학년이 글짓기 대회를 안 하는 것 때문에 화가 났고, 언니가 상 받은 것에 더 화가 났다.
자신은 충분히 받을 실력이 되는데, 못 받은 것 때문에 무척 화가 난 모양이다. 물론 상을 받을지 못 받을지 모르지만, 본인은 대회에 나가면 당연히 1등 한다고 믿고 있었다. 자신은 나가기만 하면 바로 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인데 세상이 너무나 자기를 몰라준다는 심정으로 울던 둘째 딸.
결국 저녁에 사달이 났다. 둘째가 언니가 받아온 상장이 못내 거슬린 모양이다. 잠을 안 자고 있다가 모든 가족이 잠든 후에 언니 상장을 찢어 버리는 분노의 참극을 저지른 것이다.
나중에 둘째에게 물어보니 ‘속이 시원했단다…’ 그러나 둘째를 혼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남과 비교하고, 남의 성공을 축복하지 못하고, 타인의 노력과 결과를 과소평가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타인과 비교하고, 환경을 비교하고, 하다못해 과거의 자신과도 비교한다. 과거의 성공과 현재의 실패를 비교하고 끊임없이 불평한다. 지금은 이것이 없고, 그때는 이것이 좋았는데 하면서 비교하기 시작한다면 감사는 생기지 않고 감사는 자랄 수 없다. 최초의 살인도 비교 때문에 생겼고, 에덴동산의 타락도 비교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