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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아래서](48) “당신의 한계는 무엇인가?”

[무화과나무 아래서](48)  “당신의 한계는 무엇인가?”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당신의 한계는 무엇인가?

당신이 가진 한계는 무엇인가? 불행한 인생인가? 비빌 언덕 없는 삶인가? 아니면 안주하려는 마음인가? 그것도 아니면 안주하려는 마음을 극복하는 순간 마주하게 되는 또 다른 인생의 장애물인가?

우리 대부분은 자신을 압도하는 현실 문제 때문에 한계를 경험한다. 사도행전 20장에도 현실의 한계에 압도당한 한 사람이 나온다. 그의 이름은 유두고다. ‘행운’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지만, 그의 삶은 결코 행운과 거리가 가까워 보이지 않았다. 유두고는 노예였다. 당시 노예들의 삶은 처참했다. 작은 실수에도 가혹한 체벌이 따랐고, 육체노동과 학대 속에서 대부분 서른 살도 넘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한계 속에서도 유두고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예배 장소로 나왔다. 피곤한 하루를 보냈지만,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금요철야예배에 나왔다. 하지만 늦게 도착해 앉을 자리가 없자, 그는 창틀에 앉아 말씀을 붙잡으려 애썼다. 안과 밖, 위와 아래, 생과 사의 경계에 위태롭게 앉은 그 모습은 우리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유두고는 결국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창문 밖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부모로서, 자녀로서, 직장인으로서, 학생으로서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현실의 한계에 부딪혀 추락할 때가 있다. 그러나 유두고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두고가 떨어지자 바울은 즉시 달려가 그를 품에 안았다. 성경에 나오는 ‘그 몸을 안고’라는 표현은 원어로 ‘쉠페릴람바노’인데, 이는 “함께 꼭 껴안다”라는 뜻으로, 사랑과 애정이 가득한 품어줌을 의미한다. 죄와 고난, 냄새나는 유두고의 몸을 주님은 그대로 받아주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려내셨다.

그렇다. 우리도 세상에 압도당하고 죄악 속에서 낙망해도, 주님은 넉넉한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신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품에 있을 때, 한계는 더 이상 한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며,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 된다. 그분과 함께라면 한계 속에서도 새롭게 되는 과정을 기뻐하며 즐길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아기로 오셨을 때, 그분의 앞에는 수많은 한계가 있었다. 연약한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목자조차 무시받던 시대에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다. 그분의 첫 울음소리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마구간에서 울려 퍼졌다. 배고픔, 피로, 슬픔, 목마름과 같은 인간의 연약함과 고통을 모두 겪으셨고,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극심한 고통과 죽음을 맞이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한계를 뛰어넘으셨다.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시작된 삶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의 계획 속에서 그 삶은 온 인류를 구원하는 위대한 사역이 되었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은 한계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부활의 승리로 바꾸셨다.

그렇다. 성탄은 단순히 기쁜 날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계를 넘어서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도 그분을 의지해 삶의 한계를 이겨내자는 소망의 날이다. 예수님께서 한계를 넘어 구원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의 한계도 주님의 능력 안에서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성탄의 아침, 우리는 한계를 넘어오신 주님을 찬양한다. 그분의 오심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소망과 능력을 주시는 사건이다. 주님의 오심을 기억하며, 우리도 그분의 품 안에서 삶의 한계를 극복하자. 성탄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길 기도하며, 주님의 능력으로 오늘도 새로운 승리를 경험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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