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 목사의 문학의 숲에서 만나는 진리의 오솔길] 기독교 문학 산책 – C. S. 루이스의 생애 산책(20)
강태광 목사(World Share USA대표)
옥스퍼드 소크라테스 클럽
C. S. 루이스의 삶을 살피거나 그의 작품을 살피면 만나는 두 모임이 있다. 하나는 문학 토론 클럽인 잉클링스(Inklings)였고, 또 하나는 기독교인과 비신앙인의 종교 토론장이었던 옥스퍼드 소크라테스 클럽(The Oxford Socratic Club)이었다. 이 두 모임이 C. S. 루이스가 소통에 능한 작가로, 혹은 효과적으로 대중에게 기독교 진리를 전하는 기독교 변증가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잉클링스는 매주 회원들이 글을 쓰고 쓴 글을 발표하면 동료들이 비평해주는 문학 클럽이었다. 잉클링스(Inklings)는 루이스에게 읽히는 글을 쓰고 들려지는 이야기를 개발하는 문학가의 역량을 길러 주었다. 잉클링스는 루이스와 톨킨스 등 여러 회원이 걸출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잉클링스는 루이스가 작가로 글을 쓰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반면에, 소크라테스 클럽은 기독교 교리 토론 클럽이었다. 소크라테스 클럽에서는 한주에 기독교인의 발제에 비신자가 답변하고, 다음 주에는 비신자의 발제에 기독교인이 답변하는 토론 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루이스가 사람들의 기독교에 대한 문제의식을 파악하게 해 주었고 그 대책을 생각하게 했다. 소크라테스 클럽의 회장으로 12여 년을 보내며 C. S. 루이스는 변증가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비기독교와 반기독교적인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연습을 하고 논리를 준비하여 효과적인 변증가로 성장케 하였다.
소크라테스 클럽은 옥스퍼드 신참 교목에 의해 시작되었다. 교목실에 막 배치된 스텔라 올드윙클(Stella Aldwinckle)은 옥스퍼드 대학교 소머빌리안 여대(당시 옥스퍼드에는 5개의 여대가 있었다) 신입생, 모니카 쇼튼(Monica Shorten)으로부터 불평을 들었다. 너무 상투적인 설교가 일방적으로 전해져서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모니카 쇼튼(Monica Shorten)의 불평은 비기독교인이나 불신자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존재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설교하는 것을 불평했다. 이는 지적 호기심이 많은 대학생에게 합당한 설교가 아니고 자신은 ‘이런 기독교 신앙의 전제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라는 불평을 했다. 스텔라 올드윙클 교목은 모니카 쇼튼에게 이런 생각을 하는 다른 친구들이 있느냐? 물었더니 비슷한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대답했다.
모니카 쇼튼의 얘기를 들으며 교목 스텔라 올드윙클은 학생들의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모임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스텔라 알드윙클은 “종교에 대한 철학적 접근(Philosophical Approach to Religion)”이란 모임의 공고문을 걸고 대학 내 모임을 주선했다. 공고를 본 불신자, 불가지론자 그리고 반기독교적 성향의 여대학생들이 모였다.
1942년 1월 26일에 모였던 첫 모임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많은 궁금증이 해결되었고 분위기도 좋았다. 첫 모임에 잠석했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또 만나자(Can’t we meet again?)”라는 의견을 모았다. 반응에 고무된 스텔라 올드윙클 교목은 두 번째 모임을 주선했고, 두 번째 모임도 잘 마쳤다.
두 번째 모임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스텔라 올드윙클 교목은 이 모임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학교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학교에 정식 클럽으로 등록을 하고 C.S. 루이스를 찾아가 루이스에게 옥스퍼드 소크라테스 클럽 회장직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옥스퍼드 소크라테스 클럽에서 C.S. 루이스의 역할은 지도교수요 대표자였다.
루이스는 소크라테스 클럽의 회장직을 1942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수락했다. 루이스는 거의 모든 모임에 참석했다. 그리고 C.S. 루이스는 기독교 신앙을 발표하는 발제자로 가장 많이 발표했고, 비기독교인들의 기독교를 향한 질문에 답변자로도 가장 많이 나섰다. C.S. 루이스는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겼던 1954년까지 옥스퍼드 소크라테스 클럽 회장의 임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C.S. 루이스가 옥스퍼드 소크라테스 클럽의 지도자였다면 클럽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사람은 교목 스텔라 올드윙클이었다. 스텔라 올드윙클이 소크라테스 클럽의 행정 실무와 프로그램 진행을 책임졌다. 스텔라 올드윙클이 주제를 정했고, 강사를 섭외했다. 스텔라 올드윙클은 당대에 유명한 강사들과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유망한 강사들을 섭외했다. 소크라테스 클럽이 그 당시 젊고 유능한 학자들이 실험무대로 각광받게 하였다.
소크라테스 클럽은 매주 월요일 저녁 8시 15분부터 10시 30분까지 모였다. 한 번의 모임에는 보통 60명부터 100명 정도의 학생들(및 일부 연구원들)이 모이곤 했는데, 가장 많게는 250명까지 모인 적도 있었다. 그 날은 1944년 1월 24일로서 당시에는 무신론자였던 조드(C. E. M. Joad, 1891-1853)와 루이스 사이에 토론이 벌어지던 저녁이었다. 총 27년간 414회가 모였고 강사 306명이 등장했다.
루이스가 케임브리지로 떠나자 그다음 회장은 바실 미첼(Basil Mitchell, 1917- )이 맡았으나 1960년에 이르러서는 참석자가 급격히 줄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앙에 대한 무관심의 풍조가 점점 퍼져 나갔기 때문이고, 또 자유주의 신학이 영국 교회를 감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1972년에 이르러서는 소크라테스 클럽의 모임이 더는 없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클럽의 정신과 운영방식을 모방한 클럽들이 여러 대학에서 생겨났다. 그만큼 옥스퍼드 소크라테스 클럽 운영은 성공적이었다. 옥스퍼드 대학교 소크라테스 클럽은 많은 대학생을 복음으로 인도했고 많은 젊은 학자들의 등용문이 되었고 C.S. 루이스를 전도자로 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