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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아래서 (11)]
아빠라고 부를 때, 그분을 경험하게 된다

<span style=" font: bold 0.8em Nanum Gothic, serif ; color: green;">[무화과나무 아래서 (11)]</span> </br><span style=" font: bold 0.5em Nanum Gothic, serif ; color: fuchsia;">아빠라고 부를 때, 그분을 경험하게 된다</span>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아빠라고 부를 때, 그분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기도할 때도 찬양할 때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런데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다음 성구를 한번 보라. 요한복음 5장 16~18절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위 성구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결단하는 대목이다.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결정한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서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예수님 당시에는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왜 그럴까? 예수님 이전에는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엘 샤다이, 여호와 이레, 여호와 라파, 여호와 닛시 등으로 존칭하였지만, 아버지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불경한 것이라고 믿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위대한 신으로 믿었지만, 가까이에서 아픔과 상처를 살피는 아버지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성경에서 어느 선지자도, 제사장도, 족장도, 왕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진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절대자에서, 가까이서 우리의 기도와 아픔을 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부르셨다.

임재를 경험할 때, 당신의 지경이 넓어진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하나님을 ‘너희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로 부르셨다. 이 얼마나 감동이 넘치는 순간인가! 전능한 하나님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의 아버지’가 되는 순간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아빠’라고 불리는 신은 없다. 신은 신이고, 피조물은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우리가 나의 욕심에 이끌려 실패를 경험할 때도, 삼류 인생으로 전락한 순간에도, 죽음이 나의 유일한 탈출구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우리를 품으시는 나의 아버지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들려준 아버지 이야기 중 백미는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다. 이 이야기보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잘 묘사하는 것은 없다. 자신의 욕심으로 모든 유산을 써버린 탕자지만, 그를 기다리고, 그를 용서하고, 그를 품으시는 아버지에 대한 구절을 읽으면 우리 가슴은 항상 따듯해진다. 언제나 책망하지 않고, 품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가 많고, 착한 자녀이기보다는 못된 자녀일 때가 많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해주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용기와 힘을 준다.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에도 그분의 존재는 우리가 다시 일어나게 만들고, 환경에 지배받지 않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한다. 예수님도 그런 때가 있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통곡하며 눈물로 기도하던 순간이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하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막 14:36)’

‘아빠’라는 말은 히브리서 ‘아브’에서 나온 말인데, 어린아이가 처음 아빠라고 발음할 때 내는 소리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기도한다.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일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어린아이처럼 ‘아빠’라고 하나님을 붙든 것이다. 그 순간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임한다. 너무도 두려웠던 일이, 최고로 가치 있는 일로 변한 것이다. 나의 두려움 때문에 매달린 기도가, 인류가 직면한 고난을 알게 하는 기도가 된 것이다. 그의 기도는 두려움 극복을 위한 기도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기도로 바뀐다.

그렇다. 실패와 두려움 가운데 ‘아빠’라고 부를 때 우리는 나의 생각이 바뀌고 더 큰 사명을 깨닫게 되는 경험을 한다. 더 놀라운 일을 감당하게 된다. 게임의 규칙을 바꾸고, 테이블 체인저가 되는 것이다. 나의 관점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뀌고, 나의 일이 전 세계를 품는 사명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세상의 기준으로 나를 재어보고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기쁨을 누리도록 평안을 주시는 분이다. 우리는 위험이 없어질 때 평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최고의 평안을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눈물이 우리 음식이 될 때도 아버지 날개 그늘 아래 감추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순간에도 아버지를 찾으라, 마음이 상했을 때 상했다고, 나의 마음이 깨어졌다고, 아픔이 모든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고 고백하라.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그분을 찾으라. 그때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제발 힘들다고 사람들과 넋두리하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 너무 아프고 너무 괴로워서 아버지를 부를 겨를도 없다고, 아니다. 너무 아프기 때문에 아버지를 부르고,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분을 찾아야 한다. 상처 받은 나의 마음을 달래기에 너무 바쁘다면,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너무 바쁘다면, 더욱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나의 죄악이, 나의 소망이, 나의 상처가 나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더욱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크게 외칠 필요도 없다. ‘당신은 그렇게 크게 외칠 필요가 없다, 그분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신다’라는 로렌스 형제의 고백처럼 조용히 그분 앞에 서기만 하면 된다. 우리 아버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 그냥 모든 가식을 버리고, 아빠라고 조용히 부르라. 그럼 아버지가 알아서 모든 것을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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