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牧會斷想] 믿음이 익어가는 시간
지준호 목사(헌츠빌 은퇴, 자유기고가)
믿음이 익어가는 시간
다양한 장면 전환이 있는 새벽 산책은 믿음이 익어가는 시간이다. 동쪽 하늘이 희고 연한 푸른색으로 열리기 시작할 때면 신비한 기운을 느낀다. 이러다 매치 컷 기법인 듯 핑크빛 바탕의 하늘에 붉고 검게 구름이 물들면 웅장한 영화를 감상하는 듯 환희에 찬다. 이러다 다시 산 위로 붉고 둥근 태양이 위엄 있게 떠오르면 내면에서부터 힘찬 용기가 솟는다. 이때 새들은 고운 지저귐으로 노래를 하고 난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을 흥얼거린다.
이렇게 날을 연 태양이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을 선명하게 드러낼 때 난 오만가지 못 된 것들에 매여 작고 좁아진 마음을 본다. 그리곤 허벅지가 뻐근하게 빠른 걸음을 헐떡여 걸으며 육체 속에 있던 오물들과 내면의 불순물을 땀과 함께 배출해 버린다. 그리고 신선한 산소와 말씀을 몸과 영혼에 충만히 채우며 믿음이 익는 뿌듯함을 느낀다.
넉넉한 마음 되어 집으로 돌아온 난 어두운 밤을 지샌 정원을 사랑으로 살피고 지난밤 어지러워진 잠자리를 말끔히 정돈한다. 그리고 샤워로 오물 섞인 땀을 씻어 낼 때면 무엇을 해주기를 구하기보다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가치 있게 만들까 질문하는 기도를 한다. 이러며 가슴속에 숨겼던 의문들이 풀어지며 믿음이 익는 기쁨을 또다시 누린다.
변화산 사건과 ‘믿음 없는 세대’라 탄식하신 말씀이 오랫동안 이해되지 않았다. 왜 변화산의 신비를 세 제자에게만 누리게 했을까? 변화산의 기적을 경험하면 믿음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없을 텐데…. 더욱 변화산 경험도 없는 제자들이 믿음으로 귀신 들린 자를 애처롭게 고치려 했는데, 예수님은 왜 그들에게 치료의 능력을 부여하지 않으셨던 것일까? “믿음 없는 세대”라 탄식까지 하면서…. 믿음은 과연 무얼까?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고 죽으면 천국 가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일까? 기도하면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일까? 논리에 맞지 않아 믿어지지 않는 교리를 믿는 것이 믿음일까? 그렇다면 신앙인이 되는 것은 바보가 되어야 할 텐데….
목마름을 가지고 사는 나에게 깨달음이 인다.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나를 의롭다 인정해 주시고, 부활하셔서 내 안에 계시며, 상담자가, 목자가, 친구가, 구원자가, 진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심을 믿는 것이 믿음임이 이해되면서…. 그리고 감정으로 출발한 신앙이 이성으로 확장되어 진리에서 온 지혜와 인격적인 삶에서 저절로 열매가 열리는 이치를 이해함이 믿음을 더 익게 하여 여유로운 마음이 된다.
이 마음으로 나와 연결된 모든 환경을 진리 안에서 재정립한다. 서로 다른 세대와 성으로 구성된 가족들과 나와의 관계, 빠르게 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국가와 개인의 관계, 정의와 사랑의 관계, 자연과 인류의 관계, 돈과 인간의 관계를…. 그리고 그에 따른 삶을 살며 신앙의 열매를 맛본다. 이러한 잘 익은 신앙의 맛을 모를 때 난 들은풍월이나 주관적인 생각에 의한 섣부른 지식과 신앙의 신념으로 어리석게 판단하고 결정하며 살았다. 그래서 사랑을 나누어야 할 가족이 오히려 상처를 주고받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을 원수 삼고 사기꾼에게 이용당하며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이런 국가와 세상이 될까? 왜 가족인데 사랑의 기쁨을 누리지 못할까?’ 회의에 빠지곤 했다. 그리고 삶을 편리하게 하는 돈과 문명 때문에 오히려 불행을 느끼고, 공감의 행복을 누려야 할 이웃들과 겉치레의 친분 관계를 맺으며 연극 후의 허무함과 외로움 가운데 살았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가운데 아름다운 세계의 환희와 경이를 맛보며, 내 감정을 보고 드러내고 다스리면서, 진리에서 온 지혜를 삶에 적용하는 가운데 익는다. 그리고 잘 익은 믿음은 가치와 행복을 낳고 세상에서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한다. 이렇듯 신앙생활은 삶에서 변화산의 기적을 맛보고 믿음에서 나타나는 능력을 누리며 사는 것인데, 난 익지 않은 믿음으로 도덕적이고 경건한 언행을 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려고 했다. 그러다 외식하는 자가 되어 영혼의 고독함을 느끼곤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