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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아래서 (14)]
‘불평 관성의 법칙’을 버리자

<span style=" font: bold 0.8em Nanum Gothic, serif ; color: green;">[무화과나무 아래서 (14)]</span> </br><span style=" font: bold 0.5em Nanum Gothic, serif ; color: fuchsia;">‘불평 관성의 법칙’을 버리자</span>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불평 관성의 법칙’을 버리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교회만 사랑하고, 사역만 사랑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진짜 사랑으로 사랑하고, 손해 보면서 세상을 사랑하고, 불편을 감수하면서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왜 세상을 사랑해야 하는가?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안나가) 성도든 나이롱 신자이든 요한복음 3장 16절은 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렇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한다. 비록 죄악으로 망가졌지만, 개의치 않고 독생자를 보내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는데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제발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고, 이제는 ‘세상’을 사랑하라.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서 창조한 모든 사람이다. 우리 모두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너무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것’을 사랑한다. 세상 것에 목숨 걸고, 세상 것에 눈물 흘리고, 세상 것에 절망한다. 세상 것들은 우리가 만든 우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우상을 사랑한다. 스포츠카를 사랑하고, 골드바를 사랑하고, 박사학위를 사랑하고, 멋진 명함을 사랑한다. 이제는 제발 나의 욕심을 채워주는 세상 것을 버리고, 하나님이 사랑한 ‘세상’을 사랑하라.

우선 내 옆에 있는 한 영혼이라도 온전한 사랑으로 사랑하라. 한 사람이 대수냐 할 수도 있지만 한 영혼이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천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1776년에는 한 표 차이로 미국에서 독일어 대신 영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한 명이 독일어를 쓰기로 결정했다면, 세상 공용어는 독일어가 되었을 것이다. 1845년에는 한 표 차이로 텍사스가 미국에 속하게 되었다. 1875년에는 한 표 차이로 프랑스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1923년에는 한 표 차이로 히틀러가 나치당의 리더가 되었다. 만약 한 명이 히틀러를 찍지 않았다면, 끔찍한 2차 대전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렇다. 한 사람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다. 한 사람이라도 사랑하고 더 이상 주안에서 삯꾼으로 살지 말라. 우리는 삯꾼 목자라 그러면 돈을 목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돈만 밝히는 목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 계실 당시의 유대인들이 말한 삯꾼 목자는 단순히 돈에 목적을 두고 일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인과 계약을 맺고 양을 돌보아 주는 사람을 삯꾼 목자라 했다. 이들은 100마리를 돌보기로 계약을 하면, 이 중에서 10마리는 잃어버리거나, 죽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계약을 맺고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한 마리 잃은 양을 찾기 위해서 목숨을 걸지만, 삯꾼 목자는 계약서만 있다면 10마리 정도 없어져서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이다. 우리는 돈에서 자유하고, 재정 문제에서 죄를 범하지 않으면 삯꾼이 아니라 생각하지만, 전심을 다하지 않으면 삯꾼이 되는 거였다.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만 하는 적당주의가 바로 삯꾼 목자의 생각이다. ‘이 정도만 하면 돼’, ‘뭐라 할 사람도 없는데 뭐’, ‘시간 없잖아’, ‘피곤하잖아’ 이게 삯꾼의 썩은 정신이다. 이제는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한 영혼을 시작으로 세상을 사랑하라. 삯꾼이 아닌 진짜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자.

2세기 교부, 터툴리안은 ‘말이 안 되니까 믿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해가 안 되고 말이 안 되는 그때부터 믿음의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해하기 힘드니까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기 힘드니까 사랑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 따지고 싶은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다. 이유가 없다. 사랑하니까 사랑하기도 하지만, 미워하기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것도 진실이다. 내 맘에 드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가. 기억하라. 미우니까 사랑해야 하는 것이고, 죽이고 싶으니까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혹시 사랑의 ‘사’ 자도 안 생긴다면, 억지로라도 해보라. 뇌 신경학자 이안 로버트슨은 내면적으로 무엇을 느끼던지 간에 내가 느끼고자 하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살아가면 감정은 저절로 생긴다고 했다. 그렇다. 우선 이해가 안 되고 사랑하는 것이 힘들더라도, 행동으로 표현하라.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을 설명하라고 하지 않았다. 성경은 우리에게 증거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제는 사랑을 증명하고 증거하라.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행동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행동으로 옮겨질 때 우리 사랑은 열매가 있는 진짜 사랑이 되는 것이다. 일단 행동으로 실천하면, 마음으로 사랑하게 된다.

세상을 사랑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묻지 말아야 한다. 이 ‘묻지 마 사랑’은 1892년 한국에 들어온 사무엘 무어 선교사의 원칙이다. 사무엘 선교사는 ‘곤당골교회’를 개척하는데 그 교회는 천민인 백정 마을에 있었다. 그래서 백정들 교회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교회 설립 다음 해에 청일전쟁이 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된다. 그때 사무엘 무어 선교사와 같이 사역하던 에비슨 선교사가 이 교회에서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에비슨 선교사가 오면서부터 문제가 일어났다. 에비슨 선교사는 제중원에서 일하는 의사였는데, 그는 고종의 주치의였다. 왕의 주치의가 백정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진료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구름 때 같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양반과 백정이 한 교회에서 치료를 받으며 예배를 드리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있을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때 무어 선교사가 세운 원칙이 ‘묻지 말라’다.

첫째, 신분을 묻지 말라

둘째, 직업을 묻지 말라

셋째, 계급을 묻지 말라

넷째, 당파를 묻지 말라

다섯째, 학벌을 묻지 말라

여섯째, 재산을 묻지 말라

일곱째, 고향을 묻지 말라

여덟째, 나이를 묻지 말라

아홉째, 소속을 묻지 말라

열째, 과거를 묻지 말라

무슨 이야기인가? 나의 기준과 가치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나의 기준으로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랑하기 원한다면 이제는 묻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 예수님이 과거, 계급, 재산을 가지고 판단하였다면 우리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자 세상을 사랑하기로 결단하였다면, 묻지 말고 손해 보면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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