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서 (1)] ‘아빠, 저 목사님 17살이야 ?!?!’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아빠, 저 목사님 17살이야 ?!?!’
7살 된 막내아들이 살며시 다가와서 귓속말로 물었다. 막내가 어느 키 작은 목사님을 만나고 나서 상당히 고민한 모양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어른 키인데, 이 목사님은 자신의 생각만큼 커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막내의 결론은 사람들이 목사님이라고 하니까 목사님은 맞는데, 키가 작으니 17살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목사님에게 미안해하며 작은 목소리로 아들에게 ‘아니야 그냥 목사님이야’라고 대충 얼버무리는 순간, 막내는 ‘17살’과 ‘목사’라는 이 인지부조화를 해결해냈다.
‘아하 저 목사님, 더 크겠구나!!!’ 막내 생각에는 ‘아직 17살이니 저 목사님은 더 자라서 다른 목사님처럼 큰 키가 되겠구나’라고 생각한 것이다. 약간은 민망할 수도 있는 그 목사님과 우리 막내 사이의 해프닝에서 나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자라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에베소서 4:13-15)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나이와 직분에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야 하는 사명이 주어져 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자란다’의 의미를 성장기 동안에만 일어나는 현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기간이 지나면 자라는 것보다 쌓는 것에 열중한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를 외치며 경험도 쌓고, 경력도 쌓고, 스펙도 쌓는다. 때로는 나의 능력보다 더 많은 것을 쌓아 올리려 한다. 나는 자라지 않는데, 무엇인가를 자꾸 쌓으려고 노력한다.
꼭 7살짜리 아이가 선반 위에 놓인 과자를 먹으려고 이것저것 쌓아 놓고 올라가서는 아찔한 모습 같다. 그런데 에베소서 4장 13-15절이 말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닌 듯하다. 내가 무엇인가를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자라는 것이다. 그때 ‘아하 저 목사님, 더 크겠구나!!!’라는 우리 막내의 말처럼, ‘나는 얼마나 자랐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초반에 이동원 목사님을 만났고 지구촌교회의 교인이 되었고 경배와 찬양팀에서 반주자로 꽤 오래 섬겼다. 30대 초반에 지구촌교회에서 결혼했고 목회자로 섬기기 시작했다. 40대에는 호치민 지구촌교회를 담임하며 놀라운 부흥을 누렸고, ‘리액션, 다시 하라’는 책을 써서 상도 받았다.
작년부터는 지구촌교회의 24년의 생활을 마감하고, 미국에서 이민 목회를 하고 있다.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결혼할 때는 둘이었는데, 지금은 9학년, 5학년, 1학년 세 자녀와 함께 다섯 식구가 되었고, 식구들이 늘어난 것처럼 경력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생겼다. 그런데 오늘 하루를 살면서도 드는 생각은 부끄러움이다. 이력서에 몇 줄 넣을 것들은 늘었지만, 내 삶에 그리스도를 사랑해서 그분처럼 성장한 흔적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대형교회 부목사로 섬기며 한 영혼을 아끼는 예수님의 마음을 놓칠 때가 많았고, 선교지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특히 종교경찰에 불려 갈 때마다, 전도하다 잡혀갈 때마다, ‘당신 추방시킬 거야’라고 호통 치는 그들 앞에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지 못했다는 마음 때문이다. 최소한 나의 십자가를 감당할 만큼 자랐어야 하는데 아직도 나에게 이 십자가가 너무 크고 무겁다고 투덜거리는 모습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라는 것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과 같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성장의 소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권면한 것이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로마서 15:13)
그렇다. 주안에 소망은 늘 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소망은 변화 속에서 현실이 된다. 변화가 새로운 성장을 만드는 것이다. 광야라는 삶의 변화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을 누렸고, 폭풍이라는 극심한 변화 속에서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변화가 없었다면 기적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고 믿음이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우리 모두가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경험해 보지 못한 변화 속에서 있지만, 이 시간 다시 한번 주님을 바라보며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우리 모두가 사역은 오래 했지만 2020년은 처음이다. 코로나도 처음이다. 그래서 실수도 하고, 넘어지고, 때론 상처도 생긴다. 그러나 그 속에서 매일 조금씩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좀 전까지는 해가 쨍쨍했는데, 지금은 천둥 치고 장대비가 온다. 이곳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 이곳에서 배운 것은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이 늘 일어나지만, 날씨에 순응하고 사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감사로 받아들이고, 힘들 때는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바라보며 위로를 얻는 다면 우리 모두가 주님의 장성한 분량만큼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 커 버린 우리 어른들의 성장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