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時論] 장로직에 대한 논쟁을 보면서
최근 조지아에 소재한 한 교회가 장로를 임명하자 그 교회가 소속된 지방회는 침례교회의 정체성을 흔드는 사건으로 규정하고 담임목사에게 사과를 요구했으나, 교회 측은 교회의 결정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것임을 밝힘으로써 지방회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마침 이 사건을 침례신문사가 기획취재를 함으로 전국에 크게 알려지게 되면서 논쟁의 중심은 신문이 이런 문제를 다루어 교단을 시끄럽게 만드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관한 것으로 옮겨가고 있다. 신발 끈도 매지 않았는데 달려가는 꼴이다. 우선 장로 직에 대한 논쟁을 정리하고 난 후 언론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장로직에 대한 논쟁의 핵심은 침례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옹호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침례교회의 정체성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이며, 따라서 (장로직을 포함한) 개교회가 내린 결정은 존중되어야 하고, 지방회가 개교회의 상위기관이 아니기에 감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옹호론의 논리는 교회의 ‘자유’에 관한 것이지 ‘장로’직을 옹호한 것은 아니다. 반면에 반대론자들은 ‘목사와 집사는 침례교회가 지켜야 할 정체성이며 또한 약속’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침례교의 정체성은 ‘자유’이지 ‘목사와 집사’라는 직분이 아니라고 옹호론자들은 반론한다.
침례교의 신앙과 고백에는 이 두 가지가 명백하게 선언되고 있다. 어느 것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두 가지가 현재 상호보완적이라기보다는 서로 대립적인 위치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목사와 집사의 직분을 고수하는 자들은 장로직제를 비성경적이며 비침례교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반면에 교회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자들은 장로직을 시행하는 것도 교회의 자유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논의의 첫째 핵심은 ‘침례교회에서 장로라는 이름의 직분이 과연 필요한가?’로 모아져야 한다. 한국의 침례교회에서 장로직은 부정적으로 말한다면 직분을 일종의 계급으로 여기는 문화에서 파생됐다고 볼 수 있고, 좋게 본다면 호칭의 문화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파생됐다고 볼 수 있다. 일반성도 위에 서리집사, 권사, 안수집사, 장로라는 직분의 계급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60-70년대의 침례교 부흥사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부흥회를 인도하며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침례교회에 등록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는데 ‘목사와 집사’만 교회의 직분으로 인정하는 침례교회에 장로교의 ‘장로’가 오니 어떻게 불러야 할지 혼동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 교회의 안수집사들과의 형평성도 고려해야 하고, 교단 연합 사업 때 안수집사들이 타교단의 장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니 일부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회중주의를 유지하며 장로교를 비롯한 타 교단에서 온 장로들을 그대로 장로라는 이름으로 부르려고, 당회가 없는 호칭장로’를 고안하게 되었다. 그러나 침례교 정신에 위배된다고 하여 총회에서는 매년마다 호칭장로를 없애라고 젊은 목사들이 주장을 하였고 결국 호칭장로를 칭하는 교회는 총회의 임원이 되지 못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점차로 호칭장로를 주장하는 자들이 세력을 얻어 2009년 제99차 총회에서 ‘안수집사를 장로’로 호칭하는 것이 결의되고 말았다. 결국 안수집사 위에 장로라는 계급이 있으니 타 교단의 장로가 침례교회에 와서 ‘강등’당하는 기분을 느끼면 오지 않을 것이므로 침례교회의 정체성을 흔들지 않는 선에서 호칭장로로 마무리된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미국의 한인침례교회 중에도 장로를 두는 교회가 많이 생겼다.
성경의 직분은 섬기는 것이지 계급이 아님을 깨닫는다면 과연 침례교회에 장로가 필요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침례교회가 장로와 감독을 목사와 동일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고 교회의 직분을 목사와 집사로 규정하고 있는데 별도로 장로를 두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둘째 논의는 교회의 자율성을 지방회에서 제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지방회는 친교와 협동을 위해 조직되었는가? 아니면 개교회의 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가? 이 문제도 장로교와 연관이 되어있다. 우리의 지방회에 해당하는 장로교의 노회는 교회의 상급기관이며 교회의 문제에 대해 관여하거나 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침례교회는 국가나 특정 세력이 교회를 간섭하거나 지배할 수 없다고 믿는다. 여기에는 지방회나 총회도 포함된다. 개인의 신앙의 양심과 자유를 인정하기에 믿는 자들의 집합체인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도 보호해야 할 가치라고 여긴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1742년의 필라델피아 신앙고백서에는 교회와 지방회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교리나 행정에 있어서 어려움이나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함께 교제하는 교회들이 대표자를 파견하여 문제의 차이점을 함께 생각해 보며 적절한 충고를 하고… 그러나 파견된 대표자들은… 교회 일반에 대한 사법권을 부여받아 교회나 개인에 대해서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들의 결정을 개교회나 개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2000년에 채택한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에서는 지방회나 총회가 ‘서로 다른 기관에 대해서 혹은 지역교회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다만 복음 전도를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함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지방회는 개교회에 권고나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사과’를 요구하거나 싫으면 떠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교회 또한 속한 지방회의 협동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교회의 자유만 강조할 수는 없다고 본다.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겠지만 장로직제를 도입한 교회는 안수집사로 돌리고, 지방회는 개교회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는 것으로 마무리된다면 어느 한쪽도 침례교의 정체성을 어기지 않으며 자랑스러운 침례교의 전통을 이어나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 여겨진다. 무제한의 자유는 없으며, 진정한 자유는 약속을 지키는 자유이지 약속을 파괴하면서 누리는 자유가 아니다. 이는 지방회나 개교회가 다 같이 지켜야 할 침례교 정신이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언론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한인침례교회는 자랑스럽게도 교단 자체의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신문을 갖고 있다. 아마 한인 교단들 중에는 유일할 것이다. 교단의 신문이 그 성격상 단순히 소식을 전하는 회보(會報)에 머물러야 할지, 아니면 언론의 역할을 하여야 할지 갑론을박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회보의 역할만 요구한다면 회보라고 이름을 지어야 하며 신문의 역할을 원한다면 신문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된다. 우리 교단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문(Press)이라고 이름을 부르면서 회보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신문의 기능 중에는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기능도 있지만 가려운 곳을 긁어주거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이른바 비판과 소통, 제시의 기능도 있어야 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문이 독설을 퍼붓지 못하는 사회는 신문이 필요 없다고 한다. 신문의 독설을 아프지만 받아들일 때 그 독설은 양약이 되어 어두운 곳을 밝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교단의 신문은 비판의 기능이 전무하다시피 했고 소통의 기능도 그리 활발하지 않았으며 그저 회보 수준의 소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번의 기획취재는 장로문제에 대한 여러 교회와 목회자들의 생각이 표출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앞으로도 이런 장을 많이 만들어주길 바란다. 더 나아가, 민감한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도 서슴지 말기를 바란다.
침례신문이 언론으로서의 기본적인 역할에 한 걸음 더 나아가려고 하는 이때에 격려와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또한 신문사의 펜 끝이 본인에게로 향한다고 하더라도 피하지 말고 서 있는 자세를 가질 때 침례교는 더욱 성숙할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수많은 성경적인 전통은 스스로의 잘못을 후벼 파는 고통을 이기고, 불의에 대해 용감히 일어서서 만들어 온 것들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