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社說] 감사절과 흑백 요리사
최근 화제가 된 넷플릭스 프로그램 ‘흑백 요리사’는 요리사들을 ‘흑수저’와 ‘백수저’로 나누어 대결을 펼치게 하는 독특한 설정으로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흑백 요리사’의 전체 제목은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다. 계급이라는 단어와 의미에 눈길이 간다. 제작진이 임의로 부여한 이 계급 구도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했다. 시청자들은 ‘백수저’ 요리사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흑수저’ 요리사들의 분투를 응원하며 열광했다.
이런 프로그램을 논평하는 한 유튜버는 우리 사회에는 모든 것을 계급으로 구분 짓고, 서열화하려는 뿌리 깊은 습성이 존재하며 이러한 계급화는 단순히 소득이나 직업과 같은 전통적인 사회경제적 지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거주하는 동네부터 타는 차, 입는 옷, 사용하는 물건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타고난 키나 외모까지도 우리는 끊임없이 계급(등급)을 매기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계급 구분이 마치 절대적 진리처럼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개인의 취향과 선택은 무시된 채, 집단이 정한 계급 기준이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잣대가 되어버렸다고도 지적한다. 어떤 차를 타느냐, 어떤 시계를 차느냐, 몇 평 아파트에서 사느냐, 어떤 브랜드의 옷을 입느냐, 어떤 대학을 나왔느냐, 그 대학은 몇 위의 학교인가 등이 그 사람의 계급(등급)을 정하는 기준이 된다.
그 유튜버는 이처럼 맹목적인 계급화가 이뤄지는 근본적인 원인은 역설적이게도 우리 사회의 높은 동질성에 있다고 말한다.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영토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며, 비슷한 선택지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은 그 ‘비슷함’ 속에서 미세한 차이를 발견하여 이를 계급화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것이며 불과 100여 년 전까지 존재했던 신분제의 잔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우리의 의식 속에는 여전히 ‘양반’과 ‘상놈’이라는 이분법적 계급의식이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우리는 끊임없이 ‘양반’임을 증명하려 하고, ‘상놈’ 취급을 받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는 것인데 일리가 있다.
이러한 계급화 강박은 우리 사회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제한되고, 불필요한 경쟁과 비교로 인한 스트레스가 가중되며, 결과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행복도를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계급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 이들을 ‘낙오자’로 치부하는 문화는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저해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타당한 평가이고 지적이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때다. 과연 이런 계급화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가? 남들과 비교하며 쌓아 올린 허상의 계급은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었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각자의 취향과 선택을 존중하는 성숙한 문화일 것이다. 계급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과 평가를 보며 문득 우리 교계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추수감사절을 앞둔 지금, 과연 우리는 진정한 감사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가? 아니면 교회의 규모와 성도 수, 헌금 액수를 기준으로 스스로 만든 계급 사다리를 오르내리느라 분주한 것은 아닌가?
첫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보면,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생존 기술도, 농사 도구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첫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그들에게 추수감사절은 단순한 수확의 기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이웃의 사랑을 경험한 진정한 감사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마치 한국 사회가 사는 동네, 자동차, 옷, 심지어 외모까지 계급화하듯, 우리도 교회와 목회를 규모와 재정으로 서열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저 교회는 왜 저 정도밖에 안 되나’, ‘우리 교회가 저 교회보다는 낫지’ 하는 식의 비교의식이 우리의 시선을 지배하고 있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이러한 계급의식이 목회자 사이에서도 만연하다는 점이다.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되는 것을 성공의 척도로 삼고, 작은 교회를 섬기는 것을 실패로 여기는 왜곡된 인식이 퍼져있다.
추수감사절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단순히 한해 농사를 마무리하며 수확을 자랑하는 날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고백하는 날인가? 이제 우리는 스스로 만든 계급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회의 크기나 재정 규모가 아닌,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히 감당하는 목회적 소명이야말로 진정한 가치가 되어야 한다. 진정한 감사는 비교에서 오지 않는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첫 추수감사절의 청교도들이 보여준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이웃의 사랑을 겸손히 고백하는 순수한 마음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추수감사절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