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원 목사의 청년을 품은 교회이야기] 우리의 숙명, 새벽기도(2)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이 새벽에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감동적이다. 그런데 새벽이슬 같은 청년 중에는 드물지만 ‘참이슬’을 마시고 새벽기도에 들렀던 청년도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형제가 앉았던 주변까지 술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설교가 시작될 무렵, 즉 찬송 한 곡을 부르고 성경 봉독이 막 끝나던 시점에 이 형제는 기다렸다는 듯 깊은 잠에 빠졌다. 소위 말하는 ‘입신’이 절대 아니다. 말씀 이후에 이어지는 개인기도 시간도 끝나갔지만,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결국, 교회에는 권사님 한 분과 나 그리고 실신한 듯 자고 있던 ‘참이슬’ 같은 형제, 이렇게 셋이 남았다. 얼마나 깊은 잠이 들었는지, 아니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는지 아무리 흔들고 뺨을 때리며 꼬집어도 세상모르고 잔다. 그 형제의 허벅지를 내 손바닥이 아플 만큼 감정을 실어서 때렸건만 여전히 꿈나라다. 권사님은 수건에 찬물을 적셔서 열심히 깨워보려 하셨지만, 그 또한 허사였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기가 막혔다. ‘술을 마셨으면 곱게 집에서 잠이나 잘 것이지, 새벽기도는 왜 나와서 민폐니?’ 참고 있었던 나의 불편한 심기가 입 밖으로 표현되려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권사님의 입술을 통해서 내 입을 막으셨다. “목사님, 이 청년이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시고도 다른 곳에 가지 않고 교회로, 그것도 새벽기도에 나왔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권사님의 이 한 마디는 내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이었다. 부끄러움은 오롯이 나의 몫이 되었다. 사랑이 많이 부족함을 깨닫는 순간이자 감사가 어우러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권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청년이 일어나기를 기다렸고 마침내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날 아침 나는 권사님 덕분에 새벽이슬보다는 ‘참이슬’에 가까운 청년을 격려하며 다음에 맑은 정신으로 새벽기도를 나오면 아침을 사주겠노라고 약속하며 그를 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정말 그 청년은 이틀 뒤에 맑은 정신으로 새벽기도를 나왔고 우리는 아침식사를 통해서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이후로 ‘참이슬’ 같던 청년이 새벽이슬 같은 청년으로 새벽을 깨우며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밤새 술을 마시고 우연히 새벽기도를 나왔다가 새벽기도를 통해서 성령에 취하는 은혜를 맛보게 된 것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에베소서 5:18).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내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교훈을 다시 기억나게 하셨다. 내가 대학원생으로 이곳 Binghamton으로 왔을 때의 일이다. 한인 학생회의 대학원생들이 모이면 주로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그들의 모임에 참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자청해서 ‘왕따’가 된 셈이다.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자는 순교자(?) 적인 자세로 임했다. 당시에 나는 부지런히 새벽기도를 나갔고, 대학부 간사를 맡아서 매주 금요일마다 성경공부를 인도했으며 목사님을 도와서 열심히 교회를 섬겼다. 당연히 불신자들의 모임(주로 술자리)에 얼굴을 비출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께서 출타 중에 내게 새벽기도 설교를 맡기셨다. 그날 내가 전한 본문은 19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분명하게 기억한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린도전서 9:20~21). 이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중에 성령께서 바리새인처럼 변해가는 내 모습을 조명해 주셨다. 내게 경건의 모양은 있었는지 몰라도 영혼을 사랑하는 사랑의 능력은 없었다. 한때 누구보다도 술을 즐겨 마셨던 내가 이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새벽에 눈물을 쏟으며 깊은 회개의 기도를 드리며 주님께 간절히 구했다. “주님, 지금 제 주변에 불신자들은 없고 모두 교회 안의 형제자매들뿐입니다. 만약에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면 이제는 불신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 기도는 지금껏 내가 받아본 기도의 응답 중에 가장 빨리 이루어진 기도가 아닐까 싶다. 바로 그 날 오후 당시 한인학생회 회장이 내게 전화를 했고, 나는 그들이 모이는 저녁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평소 같으면 핑계를 만들며 안 나가려고 했겠지만, 그날은 기쁨으로 정말 ‘아멘’으로 화답했다! 역시나 저녁 모임은 술자리로 이어졌고 나는 콜라와 사이다를 번갈아 마시며 무려 6시간을 버텨야 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따라 술에 취한 어떤 선배가 또 다른 술에 취한 후배의 군기를 잡는 과정에서 주먹다짐이 오갔다. 이런 장면은 내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종종 접했던 익숙한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아닌데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하나님은 내게 또다시 눈물을 주셨기 때문이다(참고로 나는 감정적인 성향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없이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의 모습의 현주소를 그날 내게 보여주셨다.
“하나님, 제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섬기겠습니다. 저를 사용해 주세요!” 물론 목사가 되겠다는 기도도 아니었고 청년 중심의 목회를 하겠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들으셨던 것 같다! 목사지만 새벽기도는 지금도 가끔씩 힘들 때가 있다. 그럼 새벽기도를 안 하면 어떨까? 편하긴 할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인도하심을 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주님과의 관계도, 목회도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이 땅의 모든 새벽기도 지킴이들에게 주님의 크신 위로와 능력이 함께 하시길 기도하며 오늘도 외쳐본다. “새벽기도는 우리의 사명이자 숙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