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미 사모의 사모의 뜨락] 할머니는 봄처녀 (1)
사랑하는 큰엄마,
너무 오랜만이었어요.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러가버렸어요. 제가 한국을 떠난 지가… 좀 더 일찍 돌아갔어야 했어요. 이제나 저제나 그러고 싶은 마음만 갖다가 14년이란 긴 시간이 흘러서야 고국 땅을 다시 한번 밟을 수 있었어요. 물론 만만치 않은 시간들이어서 눈코 뜰 새 없이 어찌어찌하며 살다 보니, 한국 땅을 밟고서 너무나 낯설어 어디로 가야 우리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 알 수도 없는 상황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이 있지만 이제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에 14년은 강산이 변해도 이만저만 변한 게 아니어서 충남 연기군 남면 종촌리 110번지가 아니라 세종특별자치시 종촌동 달빛로 가재마을 아파트 등등으로 변해버린 주소를 찾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던 거예요.
어리벙벙 얼떨떨 도무지 이 나라가 내 나라요, 내 고향인데 이렇게 낯설 수가 있는 건지 해도 해도 너무했다, 물론 내 나라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지만 말이야 라면서 말이에요. 적어도 5년에 한 번은 다녀갔어야 뭔가 연결이 되지 이건 뭘 알 수가 없으니 어쩌란 말인가, 시간이 유수와 같다고 하더니 옛말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들을 했어요. 자주는 못 드렸어도 가끔씩 드리는 전화로 큰엄마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지만, 언제나 돌아가면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과 시간이 지날수록 똑같은 말씀을 되풀이해서 하시는 큰엄마와 통화가 불가능해졌던 시점 이후로는 더 이상 안부도 여쭐 수가 없었어요.
큰엄마, 하지만 이번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큰엄마를 향한 제 마음은 아주 편안해졌답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게 거하시는 큰엄마를 만나고 손도 잡고 기도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저희 6남매가 자라나면서 배가 아프거나 열이 날 때, 빠짐없이 손을 얹어 방언으로 기도해주셔서 어린 날의 저희가 여호와 라파 치유의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큰엄마의 재미있는 방언을 장난삼아 흉내 내며 온갖 신앙의 유산을 직접적으로 물려받을 수 있게 하셨지요.
제가 큰엄마를 떠올리면 항상 떠오르는 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떤 상황에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다녀오시고 엄동설한에도 새벽기도에 갔다가 방안에 들어오실 때의 그 한기가 방안에 한껏 새벽 공기의 신선함을 불어넣었던 기억과 아침밥을 지으시면서 휘파람으로 찬송가를 부시던 그 아름다운 추억이에요. 엄마도 항상 그렇게 같이 다니셨지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두 분 엄마께서 서로 의지하시고 서로 생일도 챙겨 떡쌀을 방앗간에 맡기러 다녀오시던 기억들도 생생합니다. 맞아요,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큰엄마가 엄마를 통해 얻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식들을 함께 키우시느라 어떤 면으로는 힘들기도 하셨겠지만 저희들을 위해 새벽 재단을 쌓아 기도하시면서 모두를 신앙인으로 키워내셨지요. 그것은 큰엄마께서 하나님 앞에 가셨을 때 하나님 앞에 가장 자랑스럽게 내놓으실 공력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합니다.
물론 많이 아쉬웠어요. 미국에서 한국 가기 전에 요양원에 계신 큰엄마를 뵙게 되면, 1남 5녀 중 아들은 태몽도 내가 꿨고 기도도 내가 해서 낳았다고 말씀하시던 오빠조차도 알아보시지 못하는 상황이심에도 불구하고 제가 가면 어찌하든 저를 알아보게 해달라고 억지 쓰는 기도를 하고 갔는데 그래도 알아보지 못하시는 큰엄마 앞에서 아린 마음은 있었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어요. 큰엄마의 건강하신 모습을 보는 것이 기뻤으니까요. 게다가 송지미? 송지미가 누구여? 하실 때의 그 억양은 옛날 그대로여서 지금은 기억하시지 못해도 잠재의식 속에서는 저를 알고 기억하신다는 확신이 들어 많이 기뻤습니다.
큰엄마, 큰엄마가 저를 보고 일이 손에 착 안 붙는다고 하셨던 거 기억하시지요? 일을 보면 척 달라붙어 일해야 한다고도 하셨지요? 어쩌면 저는 지금도 똑같아요. 일을 억척스럽게 하지도 못하고 제 일은 잘 줄지도 않는 것 같이 느껴질 때면 항상 큰엄마의 그 말씀을 기억하며 웃곤 한답니다. 그래도 항상 제게 제일 착하다, 공부도 잘한다 하시면서 사람들한테 자랑하실 때면 그런 말씀 좀 하시지 말라고, 자랑 좀 그만 하시라고 싫은 소리 했었는데 이제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니, 큰엄마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셨던 것이 참 기억에 남아요. 정말 사람들 앞에서 진심으로 자랑하고 싶으셨구나 하는 생각에 참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제가 지금도 음식을 푸짐하게 척척 만들어 내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먹을 만한 음식을 할 줄 아는데, 제가 큰엄마께 맛난 음식 해드린 기억이 없어서 또 한편에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큰엄마께서 추운 날 말리는 볏단들을 뒤집으러 가자고 하시면 쫄랑쫄랑 말없이 쫓아 나섰던 기억이 있기에 그나마라도 위안을 얻습니다.
요즘은 다시 생각나는 부분이 언젠가 추운 날 아침, 새벽기도회 마치시고 돌아와 아침을 지으실 때 제가 부엌에 들어갔다가 엄마 옷을 입고 큰 가마솥에 왕겨를 끼얹으며 풍구를 돌리시던 집 없는 아줌마를 엄마인 줄 알고 불렀다가 시커먼 얼굴을 돌리시는 아줌마 때문에 너무 놀라서 운 적이 있는 것 기억하세요? 그렇게 사람들 불러다가 먹이시고 입히시고 재우시고 하시던… 그때는 저희가 불평을 많이 했었지요. 지금도 여전히 그런 일을 하시면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불평 안하리라는 자신은 없어요. 그런데도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귀한 일이었는지를 알지요.
또 있지요, 큰엄마를 생각하면 정말 많은 생각이 떠올라요… ㅎㅎㅎ 어떻게 큰엄마는 아저씨들을 막걸리 받아 드리면서 전도하실 생각을 하셨어요? 담배 한 갑 사주면서 교회 오라고도 하시고….ㅋㅋㅋ 너무나 우스워요. 저는 생각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이해할 수 없다고도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것도 정말 좋은 전도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통해 전도의 문을 여는 일… 그 문을 통해 복음이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수단이요, 방법인 거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하나님께서 술을 끊어야 되면 술을 끊게 하실 거고 담배를 피우지 않도록 하실 거면 그렇게도 하실 테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큰엄마의 엉뚱한 전도방법이 귀감이 된다고 생각해요…
아, 이걸 어쩌지요? 큰엄마의 기억이 너무 많아 제가 여기서 편지를 마무리할 수가 없어요… 큰엄마, 오늘은 여기서 이만 줄일게요. 다음 호 미주침례신문을 기다려주세요. 다음 호에도 큰엄마께 못다 한 말씀을 전할게요. 아쉽지만 다음에 다시 지면을 통해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큰엄마를 사랑하는 넷째 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