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웨스턴 칼럼-안지영] 아브라함 이야기 2 – 아브람을 찾아오시다 (창 12:1-3)
안지영 교수 – 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교수
아브라함 이야기 2 – 아브람을 찾아오시다 (창 12:1-3)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온 아브람의 삶은 이민자의 삶이고 주변부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가나안 땅에서의 아브람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하란에서의 아브람이 꽤 괜찮은 인생이었는지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아브람의 하란 생활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한 가지 확실한 정보가 있습니다. 그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남자 결혼 적령기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었던 것 같습니다. (창 11:12-26 참조) 그게 사실이라면, 열 살 더 어린 사래는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이었을 것입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자식이 없다는 것은 매우 곤혹스러운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불임’은 현대 사회에서도 몹시 난처하고 고통스러운 문제이지요. 하물며 자식과 자손 보는 걸 절대적 가치로 여겼던 아브람 시대는 말해 무엇을 할까요.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하루 종일, 어쩌면 잠자리에 들고난 후 꿈속에서까지 자식 갖기를 소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아브람과 사래의 인생이 팍팍하고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자식을 얻기 위해서, 당시에 할 수 있는 민간요법이란 요법은 다 시도를 해 보았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이를 점지해 주는 무당을 찾아가 빌어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수고가 허사였을 겁니다. 그렇게 하길 수십 년, 자식 없는 빈자리를 그대로 둔 채, 참 긴 세월을 보낸 아브람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은 일부다처제가 용인되던 그 세계였기에 아브람은 두 번째, 세 번째 아내를 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옆은 항상 사래가 지키고 있었네요.
여하튼 하란도 아브람에게는 그리 희망찬 곳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할 빈 마음을 가누며 살아가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어느 날,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신이 찾아온 겁니다. 자식 얻기를 포기하고 절망에 밥 말아먹으며 살던 그때, ‘여호와’라는 신이 찾아온 것입니다. 아브람이나 그의 아버지 조상들은 셈 족 출신이긴 하지만, 함 족 후손들이 세운 나라에 살면서, 그들의 종교와 그들의 세계관에 젖어 살았습니다.(수 24:2) 그러니 ‘여호와’라는 신은 들어보지도 못한 낯선 신이었지요. 노아의 방주라든가 하는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의 전설처럼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잘 알지도 못하는 ‘여호와’라는 신이 자기에게 찾아와 턱 하니 약속까지 해줍니다. ‘자식’을 주겠다고 말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믿기 어려운 놀라운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도 해 주지 못한 것을 신이 해 주겠다고 하는 이 약속을 아브람이 거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에게 있어 가장 절대적인 가치였던 ‘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이 신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여호와’라는 신은 아브람에게 불쑥 찾아왔습니다. 자식을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지난 수십 년 동안 아브람을 찾아온 신은 없었습니다. 아니 그럴 수 있는 신이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모두 아브람이 ‘찾아가’ 간청을 해야만 하는 신들이었습니다. 행여나 하는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했지만 결국은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것도 수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이번에는 다를 것만 같습니다. 아브람이 찾은 것이 아니라, 그 신이 찾아온 것이니 말입니다. 아브람은 자기를 찾아온 이 신의 약속은 받아들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 같습니다. 아브람은 이 신이 내민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향 땅에서의 안정된 삶을 포기해야 하고, 여행 길목마다 있을지 모를 약탈 또한 각오해야 합니다. 그리고 낯선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주변부 삶을 각오해야 합니다. 억울해도 참아야 하고, 사람들 눈에 특출하게 드러나도 곤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은 그 모든 것을 묻어버릴 만큼 아브람에게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벽에 부딪칠 때, 그 돌파구를 찾으려고 신을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 앞에 놓여있는 풀 수 없는 문제를 놓고 씨름하다가 하늘을 바라보게 됩니다. 아마 교회에 나오는 대부분은 개인적인 사정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순전히 진리를 찾아 영적인 순례를 위해 교회 문을 두드리는 경우는 드물지요. 그만큼 신을 믿는다는 것은 매우 현실적인 필요에서 출발합니다. 아브람도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겠다고 하나님께서 제안하셨기 때문에 따른 것이지,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따른 것이 아니지요. 이렇게 자기 한계성 안에 갇힌 우리는 초월자의 손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필요 때문에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게 됩니다. 이런 과정은 신을 찾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함을 느끼는 자에게 찾아오십니다. 그 필요를 매개로 하여, 우리와 관계를 맺으려고 하십니다. 나름의 목적을 위하여.
그럼 그냥 자식을 주시면 되지 굳이 고향 땅을 떠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향 땅이나 이주할 땅이나 별반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하기에 고향 땅이 이주할 땅보다 훨씬 조건이 좋았지요. 또한 고향 땅도 우상이 가득한 곳이요, 가나안 땅도 우상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이 고향 땅보다 무엇인가 더 나은 점이 있다면 모르겠는데, 전혀 그렇지 못한데도 그곳으로 가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러고 보니, 고향은 너무나 익숙하고 안전한 곳입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즉시 손을 내밀 데가 있는 곳이지요. 반면에 타향은 어색하고 안전치 않은 곳입니다. 도움의 손길을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향 땅에서는 하나님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반면에, 타향 땅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이 절실합니다. 마치 한국에 있을 때는 하나님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다가, 미국 땅에 와서는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과 비슷하지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고향을 등지고 타향살이를 요구하셨을 때 자식을 주시겠다는 약속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자식과 후손이 ‘큰 민족’이 되며, ‘큰 이름’을 얻게 하시겠다는 약속도 하셨습니다. ‘복의 근원’ 되도록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거기에다 아브람을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복을 내리시고,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실 것이라는 약속도 하셨습니다. 엄청난 보장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큰 민족’, ‘큰 이름’은 어떤 의미일까요? 아무도 넘보지 못할 강력한 민족? 혹은 다른 민족들 위에 우뚝 서는 그런 대단한 민족? 성경은 이런 것을 복이라고 하는 건가요? 어쩌면, ‘크게 됨’을 ‘성공’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로 올라가거나, 큰 회사를 운영하게 되거나, 최고 대학 출신이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정상에 오르게 된다는 고지론이 각광을 받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따라 사는 삶과 세상을 따라 사는 삶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성경의 기준이 세상의 기준과 다르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크게 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 머리를 싸매고 책상머리에 앉아서 씨름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의외로 간단하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크게 될 것을 약속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아브람의 자손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람의 후손들이 다른 주변 사람들에게 복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크게 됨’과 ‘복의 근원’ 혹은 ‘모든 민족에게 복이 됨’이 같은 뜻을 가진다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따라 살게 되면, 나의 삶이 내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 삶이 될 것이며, 하나님은 이런 삶을 ‘위대한 삶’이라고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무조건 네 편’이라는 말이 아니지요. 내 주변의 어떤 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나의 방식을 좋아해서 그도 나와 같은 삶을 선택한다면, 그도 나와 함께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가 됩니다. 그 반대로, 싫어하여 거부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복을 걷어차 버리게 되니, 자연스럽게 하나님도 그를 거부한 게 된다는 의미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결과와 거부한 결과는 하나님의 복과 저주라는 확연히 큰 차이를 가져올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기 자손에게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는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어쩌면 자식을 주시겠다는 그 약속 하나만으로도 그는 흥분에 싸여서 더 깊은 의미를 생각해 볼 여지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하나씩 하나씩 양파껍질 벗겨내듯 알아가겠지요. 이제 아브람은 고향 땅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짐을 챙겨서 미지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은 그의 인생길에 들어오셔서 함께 걸어갈 기회를 마련하셨습니다.
아브람의 인생에 찾아 들어오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나의 삶 속에도 찾아오셨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에게 찾아오셔서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그리고는 내 인생길에 동행하셨습니다. 비록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같이 간다는 하나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 같았습니다. 숨어있는 하나님을 찾으려 이곳저곳을 뒤지기를 되풀이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아브람도 나와 다를 바 없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 3편에서 계속 (매주 목요일에 업로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