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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스턴 칼럼-안지영]
아브라함 이야기 5 – 성경이 제공하는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기

<span style=" font: bold 0.8em Nanum Gothic, serif ; color: green;">[미드웨스턴 칼럼-안지영]</span> </br><span style=" font: bold 0.5em Nanum Gothic, serif ; color: fuchsia;">아브라함 이야기 5 – 성경이 제공하는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기</span>

안지영 교수 – 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교수

아브라함 이야기 5 – 성경이 제공하는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기

아브람의 인생길을 더 살피기 전에 먼저 우리가 넘어야 할 장애물부터 다뤄야겠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구약에는 그런 경우가 더 많이 나오지요. 그런 어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문화적 차이가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화적 차이라면, 좀 더 그 차이를 좁힐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면 되겠지만, 어떤 것은 그것조차 쉽지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차이를 좁힐 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런 경우, 그냥 그 차이를 그대로 두고, 결론을 보류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성경의 내용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 때문에 성경에 대한 신뢰감에 금이 가버려 우리 속에 ‘의심’의 그림자가 은근히 스며드는 경우가 생깁니다. 무엇인가 설득되지 않는 요소들이 있으면 말이지요.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명확하게 알 수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 자신이 모순덩어리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성경에서 언급한 비현실적인 점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불편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찜찜한 부분을 해결해 보려고 나름 여러 시도를 해 봅니다. 고대 근동 자료에 접근하는 데 한계를 가진 나는 성경의 텍스트 자체를 통해서 그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물론 나중에 고대 근동 자료나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더 알 수 있다면, 지금 내가 시도해서 얻어낸 해석을 수정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것 또한 내가 거부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오히려 더 나은 증거를 얻었으니 기뻐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성경 텍스트를 들여다보려 합니다.

내가 창세기 12장을 읽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래가 이집트 왕궁의 신하들의 눈에 아름답게 보여서 왕의 아내로 천거되어 왕궁으로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아마도 정실이 아니라, 여러 아내 중의 하나로 들어가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왕궁으로 들어가는 사래의 나이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사래가 아브람과 함께 하란을 떠났을 때가 65세였으니까요. 가나안에 도착하여 네겝 광야까지 이주했다가, 이집트로 들어갔을 때가 언제인지 성경은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이동 기간을 짧게 잡는다면 여전히 65세라고 해도 별반 문제가 없을 것 같네요.

그런데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림잡아 65세의 여인을 이집트 왕에게 소개할 만큼 아름다운 여인으로 묘사했다는 겁니다. 예순다섯의 나이면 이 시대의 관점으로 볼 때, 매력적인 여인으로 왕의 아내로 선택받을 수 있기가 어려운 조건이지요. 소위 육체적 아름다움의 개념으로는 65세인 여인을 매력적이라고 묘사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성경에 나오는 고대 인물들의 수명이 수백 년이라는 것도 우리에게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성경의 기록을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성경에 접근하여 해석하는 길이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제시한 프레임을 받아들이고 그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그 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의 수명과 신체적 조건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나 또한 당시 사람들의 신체적 환경에 관한 과학적 연구 결과를 제대로 접해 보질 않았기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하여 확고한 입장을 얘기할 형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성경의 프레임을 기준으로 삼아서 추정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아브람과 사래의 나이 때 신체적 상태가 어떠했는지 추정을 해 봐야겠습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아브람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100세가 되는 해에 아이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자기 아내 사래의 경수가 끊어진 지가 언젠데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땅에 엎드린 채 웃었습니다. 사래에게 월경이 완전히 끊어졌으니, 이제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무하거든요. 그런데 이제야 나타나서는, 사래가 내년 이맘때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이 말이 되지도 않는 얘기라고 웃어버린 겁니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지요.

아브람이 그렇게 태도를 가졌던 게 무리가 아닌 것이, 사래의 생리가 멈췄다는 것은 임신이 안 되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래가 생리가 완전히 멈춘 나이가 89세였다는 것이 당시의 육체적 조건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됩니다. 그 당시의 여성들의 육체적 시간이 현대 여성의 육체적 시간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성의 생리가 단번에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기간을 두고 서서히 끊어지는 것이 자연스럽지요. 그러니 사래가 80세 중반에 갱년기가 시작되어 80세 후반에 생리 작용이 완전히 멈췄다고 봐야 할 겁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사래를 찾아오셨을 때가 사래가 아이를 낳지 못할 신체적 변화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 시점보다 후일 것입니다. 그러니 사래의 생리가 끊기기 시작한 나이를 80세 중반으로 봐도 무난할 겁니다.

이에 비해 현대 여성들은 갱년기를 경험하는 나이가 일반적으로 50세 전후입니다. 사래의 갱년기가 80세 중반인 반면에 현대 여성의 경우에는 50세 전후에 발생하지요. 다시 말해, 사래의 80세 중후반이 현대 여성의 50대 초반 전후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사래가 65세였을 때를 지금 시대의 나이로 환산을 해 본다면 30대 중후반 혹은 40대 초반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게다가 사래는 결혼을 했지만, 아직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는 여인이잖습니까. 그렇다면 현대 여성 중에 아직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는 30대 후반 혹은 40대 초반의 여성이 당시 사래의 신체적 조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내가 어렸을 시절에는, 나이 65세면 말 그대로 할아버지 할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65세는 과거의 40대 장년의 신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렇게 추정해 본다면, 사래의 65세가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니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이렇게 본다면, 사래가 65세 때 바로 왕 집안으로 불려 간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초경이 시작되어 결혼을 할 수 있는 아주 젊은 나이는 아니지만, 완숙한 여인으로서 매력을 가진 사래로 말입니다.

게다가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예가 있습니다. 창세기 20장에 보면, 이스마엘이 어머니 하갈과 함께 아브람의 집에서 쫓겨나 광야로 내몰린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이스마엘의 나이가 약 열일곱 살 정도라고 추정합니다. 지금 나이 열일곱이면 건장한 체격에 엄마를 업고 다녀도 지치지 않을 만한 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 열일곱의 이스마엘이 자기 엄마보다 더 지쳐서 그만 쓰러져 버린 장면이 나오지요. 물론 그동안 가깝게 지냈던 아버지를 뒤로하고 강제로 쫓겨났으니 그 심정이 말이 아니었겠지만, 그럼에도 그의 체력은 엄마보다는 강했을 겁니다. 현대 청소년들의 체력으로 감안한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스마엘의 체력 나이와 현시대 청소년의 체력 나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추정합니다. 사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또한 이삭의 경우도 그의 나이와 현시대의 같은 나이의 체력과 체격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삭이 아버지와 모리아 산으로 제사를 지내러 갈 때, 이삭의 나이를 청소년으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100세를 훌쩍 넘긴 아브람이 청소년기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어떻게 이삭을 묶었을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삭이 아버지가 자기를 제물로 삼는다는 것을 알고 묵묵히 묶였다고 하기에는 이삭의 믿음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후의 이삭의 영성이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아브람의 갑작스러운 결박에 의해 이삭이 묶였다고 볼 수 있고, 그렇게 늙은 아버지에게 결박될 만큼 청소년 이삭의 신체적 나이는 지금보다 훨씬 어렸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와 현시대의 신체적 나이의 간격은 점점 좁혀지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브람 시대의 신체적 나이와 현시대의 신체적 나이의 간격을 염두에 둘 때, 사래가 왕의 아내로 불려 가는 사건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라 봅니다. 더군다나, 당시의 일부다처제가 가지는 경제-사회적 의미를 고려해야 합니다. 결혼을 통하여 여러 가문과 혈연관계를 맺게 되면, 외부의 공격을 함께 대응할 수 있는 힘을 도모할 수 있게 됩니다.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비멜렉 왕에게 다시 첩으로 넘겨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 시점이 바로 갱년기가 끝난 시점으로 보면, 사라는 40 후반이나 50 초반의 현대 여성의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아직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신체조건을 가진 여성으로 말입니다. 이런 사안을 감안해서 그 사건을 읽어야 할 겁니다. 현시대에 40 후반이나 50 초반의 결혼하지 않은 여성일 경우에 여전히 남자의 시선을 끄는 매력을 풍기는 경우도 충분히 있으니까요.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사래의 경우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취급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이 자리에서 다루고 싶은 것은 ‘아름다움’의 기준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사래가 아름다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 아름다움은 현시대에서 말하는 팔등신의 모델과 같은 호리호리한 여인을 말하는 걸까요?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대마다, 문화마다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세 시대 유럽의 여인들 초상화를 보면, 현시대의 기준에서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아닙니다. 비만이어서 살을 빼야 하는 여인들이지요. 그러나 그 당시에는 풍만한 여인으로서 그것을 아름다움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이렇게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대마다 문화마다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았던 파푸아뉴기니 원주민들의 아름다움의 기준 또한 현대의 아름다움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한 신부의 신부값을 정할 때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나의 동료 선교사가 있던 부족에서는 여인의 덩치가 매우 커야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어야 합니다. 덩치가 커야 하는 이유는 힘이 세서 밭일을 잘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는 건강한 몸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그들의 문화 속에서는 이러한 여인이 아름다운 여인인 겁니다.

이삭의 아내였던 리브가 또한 힘이 매우 센 여인이었습니다. 아브람의 종이 먹을 물을 달라고 했을 때, 리브가는 그 종에게 물을 주었을 뿐 아니라, 낙타 열 마리가 충분히 마실 물을 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보통 낙타 한 마리가 마시는 양이 보통 100ℓ라고 하니, 열 마리면 1t의 물을 길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여인으로서 이렇게 많은 양의 물을 길어 낙타에게 줄 정도였으면, 리브가는 매우 힘이 센 여인이었을 겁니다.

또한 야곱의 아내 라헬도 힘센 여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야곱이 하란에 있는 삼촌 라반의 집 가까이 이르렀을 때,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납니다. 라헬은 다른 목동들과 함께 양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힘든 일 중의 하나였던 양치는 일을 라헬이 했던 것을 보면, 라헬 또한 건장한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라헬이 야곱의 눈에 쏙 들었다고 한 것을 보면, 당시의 아름다움의 기준이 지금의 기준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은 창세기를 읽으면서 나의 눈에 들어온 장애물이었습니다. 아브람의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소화하기가 어려웠던 부분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해결해 보기 위하여, 성경 텍스트에 나타나 있는 여러 정황을 살펴서 종합해 본 겁니다. 이런 접근을 통해 성경을 이해해 보려고 한 것에 대해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 보았습니다. 언젠가 새로운 자료를 보게 되면, 새로운 관점으로 성경의 텍스트를 다룰 수 있을 겁니다. 배움은 언제나 새로우니까요.

  • 6편에서 계속 (매주 목요일에 업로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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