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웨스턴 칼럼-정우현] 정인이 사건으로 본 ‘독실한’ 페르소나
정우현 교수 – 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석사원 디렉터
정인이 사건으로 본 ‘독실한’ 페르소나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에서 내레이터는 방송 시작 5분여 만에 충격적인 멘트를 날린다. 정인이를 죽게 한 양부모를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충격이다. ‘독실한 기독인’이 한 살 아기를 폭력으로 죽게 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인이 양부모는 정말 독실한 기독인이었을까? 아니면 폭력을 가한 적이 없진 않을까? 독실함과 살인적 폭력이 한 사람에게 동시에 공존할 수 있을까? 진짜 독실하다면 아기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을까?
독실하다는 말은 사전적으로 믿음이 두텁고 성실하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여기 성실이라는 말은 보는 사람이 없어도 변함없이 소신을 지키는 성품을 말한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는 코람데오의 삶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어느 상황에서도 거듭난 새사람의 인생을 꿋꿋이 지켜나가는 강직함이다. 결코 남들 보기에 겉으로만 독실한 사람으로 보이려는 것과 다르다.
페르소나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겉으로 드러내는 자기 모습이다. 예를 들어 SNS에 뽀얗게 보정한 멋진 사진에 그려지는 나의 모습이 페르소나다. 우리는 빈번하게 자신의 모습을 사회적 가면으로 가려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 또 하나의 내 모습으로 가장한다. 그런 페르소나는 위험하다. 우리의 인생이 마치 무대 위에 올려진 연극과 같다 할지라도 본래의 자신과 페르소나를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면 과하게 말해 정서장애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교회가 페르소나의 위험성이 크다.
교인들의 모임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모임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의는 교회의 규범적 가치다. 모든 사회 규범이 그렇듯 교회 안에서도 규범이 만드는 사회적 압력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주일에 예배 출석을 위해 집에서 출발하여 예배당에 가까워질수록 교인들의 도덕성 지수가 올라간다고 한다. 한국 전통 사회가 갖는 유교적 체면 문화는 규범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한다. 서양의 개인주의와 반대되는 동양적 집산주의는 교회가 하나 되게 하는 장점이 있지만, 종교적 형식주의를 만들 부작용도 만든다.
교인들에게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물을 원하세요? 아니면 하나님을 원하세요?”라고 물으면 대다수가 하나님을 원한다고 답한다. 재차 묻는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왜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하세요?” 이 질문이 나오면 보통은 묵묵부답이다. 너무 당연해서 따져본 적이 없다. 다만 질문에 정답을 말한 것뿐이다. 정답을 맞히는 것이 정답을 살아 내기보다 쉽고 사회적 체면을 세우기에 전자의 경우면 충분하다. 그냥 정답을 알아 놓았다가 누가 물을 때 답할 수 있으면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MMPI 인성검사를 받는 응답자가 여러 질문에 대해 응답을 한다. 분석자가 검사 결과를 분석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이 응답의 신뢰도다. 응답자가 얼마나 정직하게 자기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였는지 알게 해주는 척도다. 흥미롭게도 사역에 자신감을 보이는 목회자 또는 신앙생활을 행복하게 한다는 기독인일수록 원래의 자기 모습보다 더 훌륭해 보이도록 응답하는 소위 ‘Faking good’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신자들에게 Faking good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영적 지도자 또는 인정받는 신자가 느끼는 사회적 책임감과 연결되어 있다. ‘교회는 나에게 달려있다. 내가 못하면 하나님 영광을 가리게 된다.’
어쩌면 정인이 양부모는 이러한 사회적 책임감을 본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느끼고 있었을지 모른다. 힘들면 힘들다, 못하겠으면 못하겠다고 말했어야 했다. 어려우면 어렵다고, 부족하면 부족하다고 고백했어야 했다. 아마도 그들을 괴롭혔던 것은 ‘난, 감당할 수 없어… 하지만 절대 힘든 모습을 보여서는 안 돼!’라는 강박적 신념이 아니었을까? 사회적으로 이미 만들어진 그들의 페르소나를 부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고 있진 않았을까?
그게 맞는다면 ‘그것이 알고 싶다’가 그들을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명명한 것은 틀린 말일 수 있겠다. 대신 어느 뉴스 기사가 그들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척”하는 사람들로 지칭한 것이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만약 진짜 독실한 신자가 폭력을 행사하거나 아기를 방치하여 죽게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면, 그게 성경이 말하는 독실한 신자라면, 그런 기독교를 믿고 따를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이 칭찬하고 인정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 자신을 속이는 게 독실함이라면 그게 진짜 신앙인가? 사람들이 칭찬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쇼윈도’ 인생이 우리가 원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맞는가? 정치적 파워를 갖게 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재산 많은 부자가 되게 해주는 교회가 우리가 말하는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맞는가?
그렇다면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 하느니라”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는 말씀은 어떤가? 사회적 기득권이나 재물을 추구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신 말씀과 그것이 정면 배치되지 않는가?
우리 신자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은 건전한 교회 성장의 요인이 될 수 없다. 정인이 사건은 한국 교회의 단면을 보여준 불편한 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교회는 언제나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의 주체는 생명의 빛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사람은 의로운 책임을 다해낼 능력이 없다. 하나님께서 하신다. 좀 더 솔직해지자. 정직해지자.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숟가락 하나 얹는 정도로 생각하자.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인정하자.
‘신앙 계급’의 상승이라는 속임수에 속지 말자. 유능한 기독인이 아니라 진짜 독실한 기독인이 되자. 신앙을 자랑하지 말자. 종교적 열심으로 자존감을 채우려 하지 말자. 사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기만 하자. 사랑의 빚진 자로서 이웃을 우리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며 묵묵히 믿음의 길을 가려고 노력하자. 잘 안 되면 안 된다고 인정하자. 잘하는 사람은 잘하는 대로, 못 하는 사람은 못 하는 대로 살자. 더는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자. 주님께 고백하자. “주여,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며 산 것을 용서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