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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스턴 신학칼럼-심민수 교수]

새해 벽두에 성경의 복을 다시 생각하며

[미드웨스턴 신학칼럼-심민수 교수] </BR></BR> 새해 벽두에 성경의 복을 다시 생각하며

 

심민수 (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교수)

한국인처럼 복을 좋아하는 민족이 또 어디 있을까? 철없던 유년기에 복(福) 자가 새겨진 은수저를 선물 받고 글자의 뜻도 모른 채, 마냥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을 기원하는 계절이다. 과연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복의 개념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가? 성경은 그 첫 장에서부터 복을 선포하고 있다. 그만큼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창조의 첫 순간, 인간에게 복을 주셨다. 성경의 복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 속에 이미 디자인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창조의 목적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27-28) 본문은 하나님의 창조설계 속에 있던 복이 어떤 의미와 목적을 지니는지 전후 맥락 속에서 조명되고 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이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의 이미지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청지기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방편을 마련하셨다. ‘복’이란 용어는 바로 이 점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땅을 관리하도록 위임받은 청지기로 부름 받았다. 여기에 필요한 능력과 성품을 주시기 위한 방식이 복이라는 용어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적 개념의 복은, 위임받은 땅(세상)을 잘 관리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을 공급받을 수 있는 특권과 이를 누릴 수 있는 권세를 의미한다. 이런 복을 작동원리로 하여 청지기의 삶을 살다 보면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부요가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 부산물들은 개연적인 것일 뿐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부수적인 것일 뿐 우선적인 것은 아니다.

성경적 복의 개념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그릇된 적용 사례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그 배후에는 비기독교적 문화와 인간의 왜곡된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대개 전통적인 복의 개념 형성 과정에는 고유한 역사적 경험과 종교적 영향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한국인처럼 오랫동안 처절한 가난이 누적되어 온 민족에게는 일반적으로 물질적 기복주의가 만연한다. 한국의 여러 종교현상이 기복주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또 한편으로, 유교적 신분주의와 입신양명 사상은 신분 상승에 대한 막연하면서도 집요한 집착을 부추겨 왔고, 복이라는 용어로 집약되어 한민족의 보편적 욕망으로 깊이 내재하게 되었다. 이렇듯, 사회적 신분상승[立身揚名]이나 물질적 번영이 곧 “복 받은 것”이란 도식은 우리 민족 속에 상상 이상으로 깊은 뿌리를 갖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런 비기독교적 인식이 목회 현장에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곡된 복 개념이 작용하는 목회 현상의 바탕에는 바로 번영신학이 있다. 인간사에 있어 쉽게 돈과 권력을 거머쥐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일어나는 흔한 일이다. 인간의 욕망을 건드려 사람들을 추동하는 일은 시동을 거는 자나, 여기에 넘어가는 자나, 혹은 이를 지켜보는 자나 모두에게 교집합의 유혹거리이다. 번영신학은 비성경적 인식과 왜곡된 욕망의 교차점에서 이런 유혹을 정당화하는 토대가 된다. 성경적 복과는 동떨어진 복을 거리낌 없이 외칠 수 있게 한다. 세속적 가치관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복을 넌지시 약속한다. 이런 양상은 오늘날 교세의 크고 작음을 불문하고 사람들을 쉽게 모으고 그들을 이끌고 가는데 유효한 도구라는 불온한 확신에서 더욱 확산된다. 결국 샤먼으로 둔갑한 종님들이 하늘의 복을 내려주는 매개자인 양 행세하며 위세를 떤다. 이런 사태의 배후에서 사단은 본질과 비본질을 바꿔 놓고, 목적과 수단을 뒤집어 놓으며 우선순위를 걷어 내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반복하건대 성경의 복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의 자리에서 청지기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그분의 생명력, 즉 그 성품과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특권을 말한다. 그 성품과 능력은 사명을 위한 것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한 것이다. 요한 3서 2절,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자주 오석 되곤 하는 본 구절은 간구 형태의 문장이다. 결코 하나님의 약속을 선언하는 표현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 허나 간구는 문자 그대로 바람일 뿐이다. 약속은 성취되지 못했을 때, 반감과 불신을 가져온다. 반면, 기원(간구)은 오히려 더 큰 소망과 기다림의 미덕을 남긴다. 기원을 약속으로 둔갑시킬 때 그 결과는 오해와 일탈을 낳는다.

물질적 번영과 사회적 지위 상승은 소명의식과 원천적 목적을 상실한 자들에게는 축복이 아니라 화가 될 수 있다.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개인의 지위가 높아지고 물질적 윤택함이 찾아왔을 때 오히려 부정적 결과가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솔로몬에게 있어서 그의 부요함은 노년의 삶을 영적 측면에서 매우 피폐하게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총리 요셉은 13년간의 고난의 경험이 있었기에 권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읽을 수 있었다. 부요와 지위는 준비된 자에게만 카이로스의 순간에 긍정적 기능을 드러낸다.

2018년 새해의 태양이 붉게 타올랐다. 우리에게 주어진 또 한 해는 세속적 복을 갈망하는 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명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자들에 의해서 영롱하게 빛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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