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서 (7)] “아저씨!!! 도와주세요!!”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아저씨!!! 도와주세요!!”
“아저씨!!! 도와주세요!!”
“………”
“아저씨!! 도와주세요!”
“죄송합니다.”
“아저씨 도와주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바빠서요”
한국에서 사역할 때 일이라서 정확히 몇 년 몇월 며칠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화를 나눈 시간만은 또렷이 기억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날의 시간은 새벽 4시 46분이었습니다. 가로등만이 어렴풋하게 어둠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새벽, 처음에는 어디서 들려오는지도 모르겠고, 저를 부르는 지도 정확하지 않은 ‘아저씨 도와주세요’를 듣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아저씨…”를 듣게 되었을 때 비로소, 주차장 외진 곳에 한 아주머니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당황하는 듯 보였고, 매우 서둘렀습니다. 아마도 어딜 급하게 가려고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병원 가시나, 아니면 새벽기도회 가시나?’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때는 저 역시도 잠시도 지체할 겨를이 없습니다.
저는 그날 새벽기도 설교 담당이었는데 자칫하다가는 예배에 지각할 상황이었습니다. 저희 집에서 교회까지가 12~13분 정도 걸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바로 차를 빼서 열심히 가도 5시 새벽예배에 간신히 도착할 수 있는 빠듯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를 불러 세운 것이 바로… “아저씨 도와주세요”였습니다. 그 아주머니의 차는 아파트 주차장의 매우 구석진 곳에 주차되어 있었고, 주변에 이중 삼중으로 주차되어 있어서 운전이 아주 능숙하지 않다면 차를 뺄 수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혼자 차를 뺄 방법이 없어 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저는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십자가가 수 놓여있는 목회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습니다. 한눈에도 목사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복장이었습니다. 만약 그분이 새벽기도회라도 가는 분이라면, 제가 목사라는 것을 눈치채셨을 것입니다. 아니면 제가 목회자라는 것을 알고 도움을 요청했을지도 오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의 요청에 선뜻 응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그 아주머니 차 뒤에서 약간은 건성으로 차 빼는 것을 도와주고 얼른 자리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대충 짧은 시간 동안 도와주고 제 차를 타는 순간, 정확히 차 문을 닫는 순간, 차 문소리와 함께 저의 가슴에 <팍> 박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새벽예배 설교 주제였습니다.
바로 ‘당신의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라…’였습니다. 새벽 설교 주제로 ‘이웃 사랑’을 준비한 목사가 새벽 예배에 늦을 것 같다고, 이웃이 도와달라고 요청하는데 마지못해 도와주다니….
그날 이후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 같은 사람이 내가 아닌가’ 하는 비수와 같은 죄책감으로 며칠을 회개하고 고민했었습니다. 그날의 기억은 제가 평생 목회하는 순간마다 저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나의 모든 삶이 예배고, 모든 환경이 목회현장인데, 교회라는 곳에서 드리는 예배만 신경 쓰고, 삶의 현장에서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닌지 늘 확인하게 하는 중요한 레슨이 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중요시하는 것을 우선시하다 보면, 주님이 중요시하는 것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 사역이라면 더더욱 그런 믿음은 확고해집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믿음이 아니라, 내 생각과 나의 습관에 따른 신앙이 믿음 생활의 완성 정도로 여기게 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명령에 묵묵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여러분,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더욱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필요한 때입니다. 혹시 나의 사역이, 성탄절 준비가, 봉사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보다 앞서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봅시다. 목회적 성공을 향한 욕망을 사역이나 믿음이라 포장하지 말고, 진정한 사랑으로 사는 2020년 12월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