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평 목사의 목회의 뒤안길에서] 사촌들이 들려주는 기쁜 소식
언니, 오빠 고마워요
결혼을 앞둔 우리는 영등포동 당산동 일대를 방을 구하러 다녔다. 방은 여럿 있었지만 우리에게 맞는 방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70년대 초는 자동차가 없던 때라 걸어서 새벽기도회에 참석해야 하기에 가능하면 가까운 곳에 얻고 싶었다. 주인들은 신혼부부라고 좋아했다.
그런데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전도사에게 방 얻을 돈 여유가 있었겠는가? 그래도 가까스로 인상 좋고 친절한 주인을 만나서 방을 정하려고 하면 예수 믿는다고 거절당하였다.
결혼식은 점점 가까워 오는데 방을 정하지 못하자 목사님이 교회학교 교실에 방을 만들게 하셨다. 우리의 아담한 신혼 단칸방에는 친구와 친척 등 방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새 신부는 찾아오는 분들을 따뜻하고 정성스럽게 맞으며 교제를 했다.
작년에 한국에 갔을 때 사촌 여동생에게서 기쁜 소식, 감사한 소식을 들었다. “언니 오빠, 내가 언니 오빠 신혼 방에 찾아갔던 것 기억하세요?” 43년 전 일이니 우리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랬어? 우린 기억이 안 나네” “나는 오빠 언니 신혼 방을 방문한 것을 잊을 수 없어요. 그럼 그때 언니 오빠가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 안 나세요?” “뭐라고 했어?” 우리는 점점 동생의 말에 끌려가고 있었다. “그 날 언니와 오빠는 나에게 꼭 예수님 믿어야 한다고 전도하셨어요”
디모데후서 4장 2절 말씀이 떠오른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사용하심을 감사한다.
사촌 동생은 강남에 있는 침례교회에서 전도사로 교구장으로 열심히 섬기며 목사님과 성도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영희야, 너희 가정이 더 화목하고 행복해
아내는 작년에 한국에 갔을 때 동갑인 사촌에게 전화를 했다. 40여 년 연락을 못하고 지내다가 전화번호를 찾게 되어 전화를 했다. “현준 씨, 나 영희인데….” 그런데 저쪽에서 들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린다. “야 영희야, 현준 씨가 뭐냐? 현준아 나 영희야 그래야지” 늘 ‘사모님’ ‘자매님’ 소리에 익숙한데 서울 한복판에서 갑자기 “영희야” 하니 약간 놀라는 것 같았다.
아내는 강릉에서 태어나 여고 시절까지 강릉에서 살았다. 큰 아버지 네는 서울 동숭동에서 살았다. 여고 시절 방학 때면 열차를 타고 큰 아버지 집에 놀러 가곤 했다. 그러면 사촌 오빠들 셋이 있지만 사촌 영희를 돌봐주는 것은 동갑인 현준이었다. 현준과 영희는 같은 고등학생이라 둘이는 누구보다 호흡이 잘 맞았다. 둘은 서울 구경을 하며 맛있는 것을 사 먹기도 하고 웃고 떠들며 즐거운 추억들이 많았다. 그리고는 작년 50년이 지나서 만나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옛 이야기하며 즐거워했다.
현준은 사촌 영희의 가정을 무척 부러워했다. “야, 영희야, 너희 가정은 참 재미있어,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 그리고 사촌들 모두 크리스천이 되어 모두 주님을 잘 섬기니 화목하고 행복해 보여. 우리 가족은 네가 알다시피 가톨릭인데, 너네처럼 그렇게 화목하고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
70이 넘는 그가 진지하게 고백하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진정한 행복이며 복음적인 교회에서 사랑하며 섬기는 삶이 참 행복이다.
43년 전, 우리 신혼 방에 찾아왔다가 예수님 믿게 되어 행복하다는 사촌 동생의 간증을 들으며 복음 전도의 열정이 더욱 되살아난다. 또한 가톨릭을 믿는 자기 집보다 복음적인 믿음으로 사는 사촌의 집이 더욱 화목하고 행복하다는 생생한 고백을 들으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