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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회 목사의 삶, 안목, 리더십]

설득력

[정태회 목사의 삶, 안목, 리더십] </br></br> 설득력

 

한국교회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외침이 있다. “교회에 올 때 사람보고 오면 실족합니다. 교회에서 실족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만 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경배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지 결코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 있는 신앙고백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웬일인지 이 말처럼 공허한 허사도 없다.

모압, 암몬, 아말렉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제압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삶을 핍절하게 만들었을 때 하나님은 에훗을 사사로 부르셨다. 그는 공물을 바치는 것으로 위장하여 모압 왕 에글론을 은밀하게 만나 허벅지에 숨겨 놓은 칼로 그를 처참하게 살해했다. 그 후 에훗은 도망하여 은밀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가장 적절한 시기에 이스라엘을 규합하여 모압을 공격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그날 모압은 이스라엘에게 굴복하였고 80년 동안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했다(삿 3:30).

이 작전의 진행을 사사기의 저자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에훗)가… 그들(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수들인 모압을 너희의 손에 넘겨주셨느니라 하매 무리가 에훗을 따라 내려가 모압 맞은편 요단강 나루를 장악하여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 그때에 모압 사람 약 만 명을 죽였으니 모두 장사요 모두 용사라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였더라”(삿 3:27-29).

에훗의 공격 명령에 설득력이 있었던 이유는 “나를 따르라”라는 외침과 모델링에 있었다. 이 외침이 신학적으로 옳은 “주님을 따르라”였다면 이스라엘은 꼼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에훗의 리더십 중 탁월한 것은 그의 추종자들이 바라보고 따라야 할 행동양식을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비록 예수를 믿었으나 문제투성이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외침은 한국교회의 상식을 초월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지나간 80년대와 90년대 제자훈련이 한창 유행(?)했던 시절 제자 훈련에 대한 일관된 비평은 이것이었다. “예수의 제자를 만드는가 아니면 리더의 제자를 만드는가?” 물론 예수의 제자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정확한 대답이다. 그러나 제자훈련을 행하는 자는 예수가 아니라 사람이다. 부정적이던 긍정적이던 리더의 영향력이 리더를 따르는 자에게 미치지 않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리더십의 정의를 초월한 실현 불가능한 사고이다. 리더십은 영향력이다. 그렇다면 리더는 “사람보고 교회에 오면 실망합니다”라는 공식을 제공하기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은 자 되라”고 외친 바울처럼 자신의 인격과 삶을 따르는 자가 카피해야할 모델로 제시할 수 있어야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설득을 위한 언어는 호감 있는 행동양식으로 뒷받침될 때만 효과가 있다.

오늘 한국 사회에 만연한 교회에 대한 안티 무드는 한국 교회에 메시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를 향해 모델로 제시하는 인격과 삶이 없어서이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의 존경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다 놓쳐버린 것은 아니다. 아직 기회가 있다. <설득의 심리학>에서 저자인 로버트 치알디니는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 설득자가 숙지해야 할 불변의 법칙으로 희소성의 법칙을 들고 있다. 대부분의 리더들의 메시지와 삶이 동일하지 않은 이때 이것을 동일하게 보여주는 리더가 나온다면 그의 희소성으로 인해 그의 설득력은 배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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