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관 목사의 목회의 길에서] “선교사님들에게 바라는 잘못된 기대”
“선교사님들에게 바라는 잘못된 기대”
예전에 어떤 성도님이 선교를 갔다가 선교사님이 선교지에서 비교적 여유 있게 사는 모습을 보고는 시험이 들었다고 하는 분을 보았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선교사님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기대가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비슷한 경우로 어떤 선교단체의 선교사님들은 미국에 와서 집회를 다닐 때 불편한 비행기를 타고 다니고, 싸구려 모텔에서 묵는다고 하면서 ‘훌륭하고 존경스럽다’고 하시는 분도 보았습니다. 우리가 선교사님을 향한 비슷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 경우 모두 옳지 않다고 느낍니다. 물론 선교사가 현지에서 호화로운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부르심을 오해해서 그런 것이고, 또 고생을 사서 한다고 무조건 훌륭하고 존경스럽다고 하는 것은 뭔가 우리 안에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해 주는 대리 만족을 찾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일단 선교사로의 부르심이 가난으로의 부르심은 아닙니다. 물론 빈민굴에서 그들과 함께 가난한 삶을 사시는 선교사님도 있지만, 모든 선교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역사상 가장 선교가 성공한 곳은 한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왔던 선교사님들은 복음만 전하고 떠나버린 것이 아니고, 그들과 함께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때 그분들은 일반 서민들이 보기에 부러움을 느낄 정도의 삶의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비교적 깨끗한 집에서, 의복도 단정하게 유지해서, 선교사님 집은 방문해 보고 싶은 곳, 사귀어 보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당시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꿈을 주었습니다.
요즈음은 오지가 아닌 이상은 어떤 선교지를 가 보아도 모두 기본적인 삶의 수준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즈음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 가도 다들 핸드폰을 가지고 있고, 많은 사람이 차를 몰고 다닙니다. 그런 사회에서 똑같이 가난하다면 그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무조건적인 고생과 가난은 선교사님 본인의 영성 관리에도 도움이 안 됩니다. 선교사도 한 사람의 인간이기 때문에 남들이 누리는 것을 누려보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게다가 선교사의 부르심은 단기적인 것이 아니고 장기적인 것입니다. 그 오랜 시간동안 기본적인 것을 못 누리고 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잔잔한 원망과 섭섭함이 들게 마련인데 그것은 영적으로도 썩 좋은 것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안다고 하셨습니다(빌 4:12). 예수님도 부자들이 초대하는 잔치를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분들도 좋은 것을 누려볼 때,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감사하게 되고, 그것이 또 다른 헌신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새 힘을 받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교사님을 만나시거든 잘 대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필요가 보일 때 공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가끔은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편한 삶을 버리고 그곳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사는 것 자체만 해도 충분한 헌신이고, 두 배로 존경받아 마땅한 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