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웨스턴 신학칼럼-조동선 교수] Augustine and Coronavirus
조동선 교수 – 미드웨스턴 조직신학 객원교수
Augustine and Coronavirus
작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에 전 세계적으로 이미 200만 명(4월 14일)이 감염되었고 사상자는 12만 7천 명에 이르렀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전 세계인들의 건강뿐만 아니라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미국의 많은 가정들이 이 국가적인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행정제재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 경제적인 생존을 할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다. 교회들은 장기간 모임을 하지 못함으로 인해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하였고 각종 신앙훈련이 중지된 상태에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코로나라는 전염병을 단순히 예상치 못한 전 세계적인 재난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가 이 재난의 기간에 배워야 할 영적인 교훈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5세기에 북아프리카에서 목회했던 어거스틴이 저술한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이라는 책에 나타난 영적 교훈들이 코로나 사태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신앙 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기독교 국가였던 로마제국의 수도가 AD 410년 고트족에 의해 침략당한 후 로마의 많은 이교도들은 기독교로 인해 로마제국이 이전의 신들에 대한 충성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런 재앙이 발생했다고 기독교를 비판하였다. 어거스틴은 이런 비판에 대해 로마제국은 하나님 도성이 아니며 이 세상의 제국들은 흥망성쇠를 겪는 것이 당연하다고 응답했다. 로마제국은 사람의 도성(The City of Man)에 속하는 것으로 이 도성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님이 설립자이며 이 도성은 거주민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 위에 세워졌다. 사람의 도성은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당할 것이며 하나님의 도성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이교도들뿐만 아니라 로마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제기한 여러 가지 신학적 문제들에 대한 답변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어떻게 재앙이 신자와 불신자에게 모두 임할 수 있는가? 어거스틴은 고난이 신자들과 불신자들에게 모두 임한다고 해서 그들이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말은 아니라고 답한다(하나님의 도성 1.8). 금이 불에 단련될 때 점점 붉어지지만, 불순물은 불에 타 버린다. 같은 키질을 당해도 곡식과 지푸라기는 따로 분리된다. 같은 하나의 고난이 불어와도 그것은 의인으로 하여금 더욱 단련되고 정결하게 되도록 하지만 불의한 자는 정죄받고 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같은 고난 가운데 불신자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하지만 신자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재난이 닥칠 때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차이는 그들이 받는 고난의 종류가 아니라 그 고난을 받는 사람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서 나타난다. 더욱이 하나님이 재난이 임하게 하실 때 불신자들과 악한 자들의 생명을 보존하여 주시는 것은 그들이 무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하나님의 도성 1.8). 코로나바이러스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기도를 더 많이 한다고 피해 가는 것이 아니다. 이 바이러스는 신앙의 유무와 무관하게 누구라도 걸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 바이러스에 전염되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재난을 믿음의 순전함이 더욱 단련될 기회로 보고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우리의 신앙고백의 진정성이 드러날 것이다.
둘째, 성도가 이 세상의 재난 속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 정당한가? 어거스틴은 ‘성도가 이 세상의 재난 속에 정말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한가?’라고 반문한다(1.10). 그렇지 않다. 집과 재산과 토지를 빼앗겨도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부요한 것들인 믿음과 경건이 어떻게 상실될 수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인의 참된 부는 자족하는 경건한 마음이다(딤전 6:6-10). 욥은 사람이 빈손으로 태어났고 죽을 때 역시 빈손으로 주님께 돌아가기 때문에 주님이 원하는 대로 주기도 하시고 가져가기도 하신다는 신앙고백을 했다(욥 1:21). 그렇다면 선한 청지기로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뜻 자체가 자신에게 가장 부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죽을 때 어차피 다 내려놓아야 할 것들을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상실하게 되었다고 비탄에 빠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의 것들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적인 것들에 마음이 빼앗긴 자라면 그것들이 사라질 때 자신이 그것들을 사랑했던 죄를 범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1.10). 어거스틴은 자기만을 위해 재산을 쌓아둔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고도 잊지 않았다. 평소에 가난한 자들과 선한 일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지 않고 이 땅에 재물을 쌓아두었던 자들은 결국 침략자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 주님은 우리의 재물을 도둑이 들어올 수도 없고 훔쳐 갈 수도 없는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자신의 재물을 유지하는 참된 길은 재난으로 인해 모든 재산을 상실하기 전에 가난한 자들과 교회의 필요와 선한 일을 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직장이나 건강을 잃으면 당장 매달 지불해야 할 많은 월 페이먼트를 내지 못해 소유한 집과 차를 압류당할까 두려움이 엄숙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니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상실할 때 우리의 참된 부요함인 믿음과 경건함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 반면 지금까지 자신만을 위해 재산을 쌓아 왔다면 이제 그것을 고통받는 형제, 자매들과 교회와 믿지 않은 이웃을 돕기 위해 써야 할 때이다. 현 코로나 사태가 하늘에 재물을 쌓아 참으로 부유해지는 시간이 되도록 하자.
셋째,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다면? 어거스틴은 사람의 도성을 지나가는 순례자(그리스도인)이든 이 도시의 거주민(불신자)이든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매일 수많은 죽음의 요인들로 인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22.22). 극심한 날씨들, 음식과 동식물에 있는 독들, 인간의 죄악들, 집의 무너짐, 말에서 떨어짐… 그러므로 죽기로 되어 있는 인간들이(히 9:27) 자신이 어떤 형태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이 공포심을 느끼며 살 필요가 없다(1.11).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고 어떤 일도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 우연히 발생하는 일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죽음의 문제도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의 한 부분에 속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 사람이 정말 두려워할 것은 죽을 때 자신이 어디로 갈 것인가이다. 가난하고 병든 몸으로 죽은 나사로는 천국에 갔지만 날마다 호화로운 삶을 살다가 죽은 불신자 부자는 지옥에 가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재난으로 인해 적절한 장례를 치르지 못했거나 땅에 묻지 못해 슬퍼하기도 한다. 어거스틴은 할 수만 있다면 성령님께서 선을 행하는 수단으로 거룩하게 하신 인간성의 한 부분이며 장차 부활할 시신을 명예롭게 장사지낼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인해 시신을 찾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면 그것으로 인해 남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처럼 절망해서는 안 된다고 권면한다. 죽은 성도의 시신이 매장되지 못했다 해도 그 성도에게 어떤 해가 미친 것은 아니다. 주님은 이 세상 모든 곳에 임재하시기 때문에 자신이 창조한 것을 어디에서 다시 회복해야 하실 줄 아신다. 장례 절차와 무관하게 주님의 눈에는 모든 성도의 죽음이 귀한 것이다(시 116:15). 적절한 장례식 절차와 슬퍼해 주는 사람들의 임재는 죽은 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을 돕는 것이다(1.12). 코로나에 걸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나 자신이 코로나에 걸려 죽게 될까 봐 과도하게 염려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하지 않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코로나와 같은 재난을 맞지 않도록 하는 것 이상으로 그 영혼이 죄 사함 받아 구원받았는지를 더욱 살펴야 한다.
넷째, 그리스도인도 이런 역사적 재난 가운데서 회개해야 하는가? 어거스틴의 답은 ‘그렇다’이다. 로마가 정복되어 약탈당한 것이 로마에 사는 이교도들 때문이었다 해도 그리스도인들도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에 대해 하나님이 심판을 할 수밖에 없게끔 흉악한 범죄를 행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시적인 심판도 받지 않을 만큼 너무나 선하며 모든 과오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다. 아무리 칭찬 듣는 그리스도인이라도 어떤 경우엔 육신적인 욕망에 떨어지기도 하며 위선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어거스틴은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평소에 불신자들과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죄를 책망하지 않은 죄를 지적한다. 그러므로 죄악이 더욱 증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죄를 범하는 사람들을 알면서도 훈계하는 것에 지쳐서 또는 그렇게 하다가 내가 손해를 볼까 봐 두려워서 또는 성공을 위해서 모르는 척 지나친다. 책망하지 않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지 참된 이웃 사랑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책망을 듣고 바른길로 돌이키는 것은 아니지만 책망을 통해 의의 길로 돌이키는 사람들도 있다. 어거스틴은 겔 33:8-9를 주목하여 파수꾼의 역할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역할임을 지적한다. 이런 이유에서 파수꾼의 역할에 실패한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과 함께한 도시에서 단체적인 재난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만큼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그 지역에서 함께 죄를 짓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죄로 인해 재난을 받는 것은 아니다. 욥처럼 어떤 보상이 없어도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경건의 굳건함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일시적인 재난을 받는 선한 그리스도인도 있다(1.9). 코로나 사태는 단순히 의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창조 세계를 잘 돌보아야 할 인간의 청지기 직분의 망각, 생명보다 돈을 더 중요시하는 철학과 윤리, 개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권력 투쟁 등이 코로나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기도 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자신부터 개혁하면서 이웃과 국가의 죄악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사랑으로 책망하는 선지자의 역할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하나님은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며 이 세상의 악은 천사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왜곡되어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어떤 악의 발생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비록 아담의 타락으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와 만물이 부패하기 시작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전능한 주권자이시다. 그분이 악을 허용하신 것은 심지어 그 악을 통제하시고 심판하시는 과정에서도 선을 이끌어 낼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요셉의 경우처럼).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에는 우연이란 없다. 코로나 사태가 우연히 발생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회와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이 코로사 사태를 허용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로 이 코로나 사태를 통해 우리 가정과 교회와 국가와 전 세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시 한번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분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사 이 사태가 속히 해결되도록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