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웨스턴 컬럼: 리더십 시리즈] 심민수 교수 세상에서 배운 리더십 ④
심민수 교수 – 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세상에서 배운 리더십 ④
성경의 직분자는 ‘섬김이’
‘리더십’은 추상적 개념이다. 리더십 연구자들은 그 추상성이 지닌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 리더의 개인적 특성 연구와 같은 구체적 양상에서 답을 얻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접근 방식의 문제점은 일반화시키기 어려운 특수 사례 연구로 그치게 된다는 점이다. 존 K. 클레멘스와 D. F. 메이어는 The Classic Touch: Lessons in Leadership 서문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리더십이라고 하면 언뜻 명확한 개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학자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떤 학자는 근 40년 동안 3000권이 넘는 리더십 관련 서적과 논문들을 살펴보았지만 ‘40년 전이나 40년이 지난 후나 리더십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 내용은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더욱이 성공적인 지도자 요건을 규정하려다 보면 극히 주관적인 내용을 나열하게 된다. … 우리가 흔히 지도자라 하면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들, 즉 ‘책임감이 강하고’ ‘목표에 대한 추진력이 뛰어나며’ ‘자신감과 인내심이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등등의 상투적인 지도자의 특성 외에도 심지어 어떤 연구 조사는 ‘성공적인 지도자일수록 차를 많이 마신다’라는 결론을 내놓기도 한다.
그동안 정치학, 경영학, 행정학 등에서 추진되어 온 리더십 연구들은 지난 세기 40년대 중반까지 리더의 특성론, 30~70년대 행동론, 60년대 이후 상황중심 연구를 거쳐 오늘날 다양한 연구 형태로 진전되어 왔다 하지만, 7~80년대부터 카리스마 리더십, 변혁적 리더십, 수퍼 리더십, 서번트 리더십, 셀프 리더십 등의 연구들이 나타나면서 다시 리더를 중심으로 하는 연구가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 이러한 리더 특성 연구들은 연구자들의 전이해와 사전 전망에 따른 주관적 통찰이나 개인적 관찰의 한계 속에 머물 수 있다는 점과 리더의 개인적 특성이 리더십의 보편적 원리로 오도될 수 있다는 점 등이 문제로 지목된다. 원리라고 하면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보편성을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특성에 불과한 내용을 마치 리더십의 원리인 양, 소개하는 주장들이 여러 채널을 통해 화려하게 치장되어 쏟아져 나오면서 부지불식간에 교계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로 인해 신앙 원리와 결을 달리하는 리더십 논리가 무분별하게 교계에 수렴되면서 기독교 리더십이 세상 지도력과 혼합된 채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교회 현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세속적 환경의 오염수가 얼마나 교묘한 형태로 우리의 무의식 세계로 흘러들어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최근 수십 년간, 교회는 세상의 용어를 선별하지 않은 채로 과도하게 사용해 왔다. 세속적 리더십 개념에 대한 무분별한 수용은 그 대표적 사례라 할 것이다. 이것은 신앙공동체가 지녀야 할 고유의 정체성 확보에 부정적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교회는 지금, ‘유리창이 깨어진 건물’처럼 세상의 온갖 먼지가 깨진 창으로 들어와 자욱하게 차버린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은 세속의 거친 물결을 막아서기 위해 교회가 붙들어야 할 원칙과 사명을 잊은 채 세속적 성공에 사로잡힌 나머지, 교회의 본질을 상실한 연고가 아닐 수 없다. 교회의 본질 문제에 둔감해진 사역자들은 세속적 오염에 대한 경고를 그저 고리타분한 율법주의로 치부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고립주의 정도로 돌려세우고 있는 형국이다. 그나마 혼합주의적 목회 현실에 대해서 무언가 문제를 느끼는 사람들마저 세속화된 교회의 모습을 그저 한탄만 할 뿐, 무엇부터 혁신해 나가야 할 지 분간을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가 하면 학계에서조차 현안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 채로 사변적 신학에만 집착해 있거나 아예 세속 학문을 대변하는 쪽에 머물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이다.
이러한 현실 상황에서 교회가 먼저 할 일은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 원형 속 인도자(리더)들의 참모습을 찾아내는 일이다. 사실, 성경의 인도자(리더)들은 사명자로서 부름 받은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주어진 사명과 역할에 헌신한 사람들이었기에 세상이 이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반적인 세상 개념의 용어로 이런 인물들을 범주화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성경 속 교회 인물들의 고유한 역할을 상정할 때는 필히 그 특징적 사명을 중심으로 설명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특히 구약성경에 나오는 초기 민족 구원의 인물들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그림자 같은 상징인물들이다. 예컨대,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 등은 한결같이 민족 구원과 보존이라고 하는 특별한 사명을 맡아 한 시대를 이끌어 갔던 인물들이다. 이런 인물들은 자신들이 처했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고유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고유한 역할이 우선적이고 핵심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점을 감안하지 않고,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리더십’이라는 용어로 이들의 모습을 담아내려고 시도한다면 부득불 지나친 일반화의 논리적 오류에 빠질 위험성이 농후하다.
요즘 회자되는 정치적 언어 프레임의 문제 현상과 마찬가지로 신앙 개념도 세속의 언어 프레임에 갇히게 되면 기독교의 원리가 그 프레임에 의해 통제되고 재단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세속의 설계본에 따라 성경의 근본 가르침이 잘려나가면서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주객전도의 현상이 일어나고 상위개념과 하위개념 간에 순서가 뒤집히는 일도 생겨난다. 본디 고유한 사명과 역할은 일반화될 수 없는 소재이다. 특별한 인물들의 생애 가운데 주어진 사명과 역할을 간과한 채 인물의 일반적 특징들을 찾는 작업은 그 인물들을 통해 전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와 메시지를 놓치는 일이 될 수 있다. 모세가 보여준 민족 구출의 스토리는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표적인 유비로서의 의미가 핵심이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역사도 약속하신 바를 끝까지 이루시는 하나님의 ‘언약 성취’라는 맥락에서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요셉이나 다윗 같은 인물들의 연구에 있어서도 독특한 사명 실현 가운데 드러나는 구속사적 메시지를 찾는 것이 우선적인 작업이 되어야 한다. 만일 이런 특별한 인물들이 지닌 본래의 사명과 역할을 간과한 채, 일반적 리더십의 요소를 찾는 작업을 감행한다면 그것은 마치 사랑하는 이의 편지 속 메시지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형식적인 방편이나 글솜씨와 같은 스킬에만 초점 맞추는 행태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본질을 놓친 것이다.
이미 전편의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신약성경은 교회의 직분자들과 세속적 종교지도자를 명확하게 그 용어 사용에서부터 구분 짓고 있다. 다시 말해, 신약성경은 교회의 인도자들을 설명하는 자리에 세속적 지도자들에게 해당되는 용어나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용례 사용의 차이는 두 대상이 지닌 본질적인 차이를 신약성경이 명확하게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성경의 용례를 통해 제시된 구별된 용어 사용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전제한다면, 비록 ‘리더’라는 용어가 성경의 인물과 세상의 인물들 양쪽 모두에서 통례적으로 사용된다고 하더라도 신앙 공동체의 범주에서 사용할 경우에는 세상의 개념 범주에서 벗어나, 오직 ‘앞서 본을 보이는 신앙적 인도자’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다. 동일한 맥락에서, 성경적 리더십의 개념도 ‘지도력’이라는 세속적 의미가 아니라 “신앙적 인도자의 선한 모델을 통해 성도들 안에 배움이 일어나는 과정”으로 풀이하는 것이 온당하다. 이러한 설명은 이미 앞에서 몇 차례 밝힌 바 있다.
에베소서 4장 11절은 교회의 인도자(리더)들을 여러 직분 형태로 소개한다.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 등으로 나열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교회를 이끄는 인도자(리더)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은사]를 주셨다(7절). 이 직분자들의 핵심 역할은 각자의 은사적 기능을 통해 성도들을 잘 구비시켜 봉사케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빠짐없이 기여토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직분자들은 은사를 따라 교회의 성도들을 인도하는 자들이다. 본문이 사도로부터 시작하여 교사에 이르기까지 직분명들을 쭉 나열하면서 영적 질서를 암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나열이 권력이나 계급을 반영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직분자들에게는 높고 낮음이 없다. 성경 본문은 그 어디에도 교회를 이끄는 직분자들에게 우열의 지위나 권력을 전제로 하여 설명한 적이 없다. 도리어 교회의 인도자(리더)들이 된다는 것은 ‘섬김’이라고 하는 탈세속적인 제자도의 실천을 강하게 주문하고 있다.
1세기 당시 사도 혹은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고 메시아적 예언을 비롯한 구약의 말씀을 그리스도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선포하고 때로는 주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초대 교회에서 사도와 선지자들은 주의 계시의 말씀을 통해 영적 질서를 세우는 기능을 감당했을 뿐, 최상위 계급자라는 신분상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은 반복해서 교회 안에서 높아지고자 하는 자들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다. 이어서 소개된, 복음 전하는 자들은 구원의 소식을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전하도록 남다른 은사를 공급받은 직분자들이었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일반 사명이지만 하나님은 땅 끝까지 구원의 소식을 적극적으로 전할 수 있는 사명자들을 특별히 세우셨다. 이들이 바로 복음 전도의 직분을 가진 자들이다. 목사와 교사에게는 돌봄과 가르침을 위한 은사가 부어짐으로써 성도들을 양육하도록 돕는 역할을 감당하게 하셨다. 이상의 모든 직분자들은 은사를 통해 교회를 섬기는 사명자들이고 그리스도의 몸이 온전히 세워지도록 함께 교회를 이끄는 자들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에베소서 4장 본문에서 교회의 직분자들은 모두가 신앙 리더들(인도자)이고 성도를 구비시키는 일에 함께 기여하는 존재들이지만 결코 세상 지도자들과 같이 계층화된 존재들은 아니다. 그 기여의 과정 자체가, 각기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상호의존 및 상호책임 하에 모두 함께 온전해져 가는 과정을 보여주게 된다. 이로써 교회 구성원 모두가 더불어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16절). 대개, 기존의 사회 조직이나 기관에서는 지휘구조의 상층부로 갈수록 그 힘이 모아지는 형태를 보인다. 그 상층부는 최고 권력기관이 되고 그에 따른 책임과 권한이 주어지며 상향적 힘의 구조를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의 일반 리더십을 지도력으로 표현하는 것도 일면 이해가 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의 직분자들은 세상의 일반적인 양상과는 분명히 다른 길을 가도록 되어 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세속의 영향을 받은 제도주의화된 교회는 세속적 지도력의 형태를 따라갔던 적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중세의 성직주의는 교회의 직분자들을 일종의 교회 계급으로 변질시키는 우를 범하였고 그 모습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 목격되는 계급화되고 권력화된 교회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경적 관점에서 말하면 그리스도 이외에 어떤 직분자도 머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람이 머리가 될 때, 교회는 원형에서 벗어나 제도주의화된 조직으로 추락하게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나머지 모든 구성원들은 그 몸의 지체들로 몸을 이룬다. 여기서 직분자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성도들을 섬길 뿐이다. 이런 자명한 성경 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않는 사례들을 우리는 현실 속에서 목격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는 성경의 선언은 단지 명시적 문구가 아니라 물리적 자연현상처럼 실제적인 원리이다. 이는 우리의 목회 현장에서 반드시 그대로 가시화되어야 할 원칙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주적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곧 한 지역교회 안에서도 주인이 되신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따라서 교회는 그분의 지시를 따라 작동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사역되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서 직분자들의 위치는 더욱 자명해진다. 모든 직분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섬김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만일 섬김의 위치가 아닌 스스로 머리가 되려는 착각에 빠진다면 그것은 자기 위치를 벗어나 월권의 자리에 서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월권의 자리에 오르려는 시도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세상 조직 속의 지도자들은 자신이 세운 목표 성취를 위해 조직의 구성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은 주님의 뜻을 함께 확인하고 그 뜻을 함께 순종해 가는 데 그 본분이 있다. 대원칙으로서의 주님의 뜻은 대부분 성경에 나와 있고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결정조차 인도자 그룹의 모든 구성원들이 주의 뜻을 함께 구하는 가운데 한마음을 갖게 되는 것으로 확인해야 한다(물론 이렇게 되려면 모든 직분자들은 성경의 원칙대로 선별되어 세워져야 한다). 교회의 직분론은 한 마디로 역할론이다. 교회의 여러 직분자들이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모든 직분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관건이다. 한 교회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뜻을 잘 이루어 나가느냐의 문제는 그 교회의 구성원들이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7)”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어느 누구도 우두머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섬기는 자만이 진정으로 인도자(리더)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고대 이스라엘은 이방나라 왕정모델을 도입하여 인간 지도자를 세우고 그에게 모든 권력과 책임을 집중시킴으로써 암담한 현실을 자초했다. 역사는 이런 안타까운 현상들이 교회 시대에도 반복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다. 사람은 예외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권력의 맛에 빠지게 되면 ‘반지의 제왕’ 속 인물들처럼 절대 반지의 마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문제를 만난다. 사명 맡은 ‘프로도’ 조차 반지의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현상이 교회 안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한다는 말이다. 권력이 크면 클수록 그 끌림도 강력해지기 마련인데 아무도 권력이 발산하는 저주스런 달콤함을 뿌리치기 어렵다. 권력의 자리에 앉게 되면, 이전 권력자를 신랄히 비난하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권력의 마력이 자연스럽게 권력자와 그 주변인들 속에 쓰며들어 그들을 통제하게 된다. 종교적 권력의 경우, 성직주의라고 하는 명분까지 얻게 되면 자기 정당화의 논리는 더욱 힘을 받아 모든 윤리적 문제까지 합리화하는 지경에 이른다. 죄성에서 비롯된 이런 모순에 대한 처방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로 하여금 상호의존, 상호책임의 공동체가 되도록 설계하셨다.
이상의 원리가 성경적인 근거를 토대로 제시됨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교회 현상 가운데 과연 얼마나 잘 적용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교회의 모든 리더에게 주어진 최우선의 가치 덕목이 ‘섬김’이라는 인식보다는 여전히 세상 지도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지도력’이라는 의식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한, 교회의 원형 회복은 요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의 리더가 ‘사명 맡은 섬김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면 혼란스런 세상 가운데서 교회가 제대로 작동되어 나갈 수 있을까?” “다양한 배경과 각양의 성격을 지닌 교인들을 단합시켜서 힘 있게 나아가려면 강력한 지도자형의 목회자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얼핏 들어보면 설득력 있어 보이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지도력’ 주창자들의 의식 저변에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세상 리더들의 모습에 의해 더 영향 받고 있는 듯하다. 물론 지역교회 안에 담임목회자나 중직들의 중요성을 무시해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직분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바로 잡기 위해 성경적인 관점에서 교회의 리더 개념을 다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음 편에 권력형 리더와 권위형 리더의 근본적인 차이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이러한 문제를 더 다루도록 하겠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