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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아래서 (15)]
불안을 잘 살펴보라

<span style=" font: bold 0.8em Nanum Gothic, serif ; color: green;">[무화과나무 아래서 (15)]</span> </br><span style=" font: bold 0.5em Nanum Gothic, serif ; color: fuchsia;">불안을 잘 살펴보라</span>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불안을 잘 살펴보라

불안감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모든 사람은 경험이 많거나 초보자나, 대범하거나 소심하거나 관계없이 불안감을 가지고 산다. 모든 사람이 갖는 불안감을 프랑스 철학자, 의사, 정신분석학자인 자끄 라캉의 해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자신의 위치와 타인과의 관계 때문이다. 타인의 기준에서

‘나는 성공했는가?’

‘나는 이 자리를 계속 차지할 수 있는가?’

‘나는 더 발전할 수 있는가?’

‘나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미래가 있을까?’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불안해한다.”

더 갖고, 더 올라가고, 더 서바이벌하는 것이 목표이고, 이것을 얻기 위해 늘 모험하는 자신을 보면서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안이 더 심해지면, 스스로 탈출구를 찾는다. 왜? 마음에 계속해서 의심과 불안이 생기니 평안을 어떻게든 얻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타인을 탓하기도 하고, 엉뚱한 데다 분풀이를 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모든 불안 요소를 없애기 위해 불안해하는 자신을 없애는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현대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살이 해답인가, 아니다. 인간 스스로 불안을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스스로 불안과 두려움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려운 이야기 같겠지만, ‘불안을 잘 살펴야 한다.’ 무슨 소린가 하는 분도 있겠지만, 불안을 잘 살펴보라. 그리고 당신이 언제 제일 불안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라. 언제 불안해서 울었는지 기억해 보라.

어릴 때 자고 일어났더니, 옆에 엄마가 없던 순간이 가장 불안하지 않았던가. 밤늦었는데 엄마가 오지 않아서 얼마나 울었는가. 놀러 갔다가 엄마를 잃어버려 얼마나 울었는가? 불안해하는 당신 마음을 잘 살펴보라. 엄마가 없어서 울었던 것처럼, 바로 주님이 없어서 불안한 것이다.

이제는 주님을 찾으라. 그리고 주님과 함께하라. 나를 품고 나를 지키시고, 나의 피할 바위와 산성이 되시는 주님과 함께한다고 믿어라. 모든 사람이 나를 조롱하고 비방하고, 내일 내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오늘 주님과 함께함을 믿어라. 그러면 죽음이 우리에게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불안한 마음과 두려운 표정은 우리에게 없을 것이다.

스데반을 생각해 보라. 사람들이 스데반을 모함할 때도 그는 당당했다. 대제사장이 그에게 질문할 때에도, 그는 당당하게 당신들은 목이 곧은 사람들이고, 성령을 거스르는 자들이라고 선포하였다.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는 순간에도 그는 불안하지 않고 당당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니 불안이 끼어들 틈도 없었다. 불안은 세상 기준으로 사는 사람들이 겪는 아픔이다. 주님을 바라보라. 하늘의 기준으로 나를 보라. 그 순간 트라우마는 극복될 것이다.

극복할 수 없어 보이는 트라우마를 가졌지만, 주님을 보기 위해 자신을 극복한 한 사람이 있다. 삭개오다. 그의 인생은 상처와 트라우마 종합 선물 세트다. 난쟁이라는 장애가 있었고, 세리여서 유대인 구실을 할 수 없었다. 법정에서 설 수도 없고, 예배의 자리에도 나올 수 없었다. 오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부정하게라도 돈을 버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청결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걸맞게 살지 못한, 이름값도 못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기 원했다. 그 순간이 삭개오가 트라우마와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트라우마는 작은 키였고, 숨어 지내는 삶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작다는 것을 인정하며, 나무에 올랐고, 사람들 앞에서 작은 자신의 모습을 높은 나무 위에서 드러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삭개오의 이 열망을 누가복음 19장 3절에서 ‘보고자 하되’라는 단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냥 ‘보자’ 정도로 해석되지만, 원어 ‘에제테이’의 의미는 좀 더 깊다. 평생에 걸쳐서 집요하게 찾았다는 의미다. 그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방법을 평생 동안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삭개오를 발견하고 그를 부르신 것은 오히려 예수님이다. 삭개오가 ‘예수님’ 이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삭개오야’라고 불렀고, ‘속히 내려오라’고도 했다. 그는 난쟁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려고 나무에 올랐지만, 예수님은 그 트라우마에서 내려오라고 명령하신다. 그렇다. 예수님이 내려오라고 한 그 순간이 바로 삭개오의 트라우마가 해결되고, 온전한 주의 백성으로, 사명자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삭개오의 트라우마에 삭개오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진 분은 바로 예수님이고, 우리보다도 우리 트라우마를 고치시기 원하고, 우릴 빛나는 존재로 세우고 싶어 하시는 분 또한 예수님이다. 이제 당신도 트라우마에서 내려오라. 트라우마를 극복하려고 이것저것 하지 말고,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사명자로 거듭나라. 그때 우리는 삭개오같이 더는 세상에 주눅 들지 않는,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될 것이다.

고린도후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

여기를 보면, ‘세상이 우리를 ~~ 하여도, 우리는 ~~ 이렇게 되지 않는다’는 표현이 4번 나온다. 4전 5기 인생이 우리라고 사도바울이 선포한 것이다. 우리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더 피할 길은 없다고 말하여도, 주님이 피할 길을 열어 주시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다.

또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 것이 우리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낙심의 길이 아니라, 약한 그 순간도 주님의 강함을 경험하는 길이다. 그리고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는 자들이다. 하나님이 붙드시기 때문에 우리 버릴 자는 이 세상에 없다. 만약 버림받았던 기억이 있다면, 그 기억을 버려라.

우리는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 거꾸러뜨림은 로마 군대 용어로, 전쟁터에서 치명상을 입고 완전히 거꾸러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기 일보 직전에 처하더라도, 절대 망하거나 죽지 않는다. 다시 일어난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이런 운명의 사람이다. 그러니 불안과 염려를 물리치고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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