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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아래서](22) 파친코의 선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서](22)  파친코의 선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파친코의 선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전 세계가 주목하는 ‘파친코’라는 드라마가 있다. 애플 티비라는 글로벌 미디어 기업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방영하고 있고, 여러 나라의 매스컴들이 매우 높은 평가를 하는 드라마이다. 아마도 2022년도 올해의 드라마가 될 것이라 조심스럽게 전망하는 소식들이 들여온다. 이 드라마에는 ‘선자’라는 한 여인 등장한다. 매우 혼란한 일제 강점기와 재일교포라는 어려운 현실에서 꿋꿋이 자기 삶을 살아가는 여인과 가족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의 원조는 사실 성경에 있다. 우리가 살필 성경 이야기 속 주인공은 삶의 매 순간이 고난이고, 아픔이었던 사람이다. 편하거나 넉넉한 길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누구 같은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다. 우리는 막연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러면 멋진 마리아를 상상할 때가 많다. 아마도 성당에서 만나게 되는 보석으로 장식된 마리아상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의 삶은 보석으로 멋지게 장식된 그런 삶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은 정말 기구했다. 결혼 전에 혼전임신하고, 파혼 위기(마 1:19)를 겪는다. 그리고 혼전 임신한 상태에서 시댁에 들어가 살게 된다(마 1:24). 이 정도만 되어도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온 마을에 아이 아버지가 요셉이 아니라는 소문이 돈다(막 6:3). 자신이 낳은 아이가 사생아라는 비난에 시달렸고, 집안도 가난했다. 유대인들은 아들을 낳으면 율법에 따라서 제물과 함께 정결예식을 치른다. 예수님의 정결례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드리던 비둘기를 제물로 드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기 예수가 고난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어머니로서 아들의 고난을 예언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라는 가슴 뛰는 예언을 받았지만, 동시에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또 다른 예언에 의구심이 생겼고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12살 된 후부터 아버지 요셉이 등장하지 않는다. 성경에 이름이 나오지 않으면 그 시점부터 죽은 것으로 신학자들은 믿고 있다. 요셉은 예수님이 청소년일 때 죽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그때부터 과부로 7남매를 키운다. 그나마 장남인 예수님이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목수로서 가장 노릇을 해야 할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도 돌고, 동네 사람들에게 죽을 뻔하기도 한다. 결국에는 가출하더니, 이상한 여인들과 어울린다는 소문도 돈다(눅 8:2-3).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설교에 열광하고, 메시야라고 치켜세웠지만, 결국에는 흉악한 범죄자로 십자가에서 죽게 된다(눅 2:35).

가장 힘들게 낳았고, 수많은 소문과 수군거림 속에서 키웠던 아들인데, 아픈 손가락과 같이 늘 신경 쓰이던 아들인데 십자가에서 죽게 되다니. 이런 어머니가 당신이라고 생각해 보라. 다시 기도하거나, 예배하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를 보내 주신다고 하셨는데, 고작 이런 것입니까’라고 따지고, 마음 상해서 영영 하나님 앞에 서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고, 120명의 제자와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성령을 받았다(행 1:17). 기구한 삶만 바라보았다면, 절대로 기도에 자리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말씀을 믿었고, 예수를 아들이 아닌 그리스도로 믿었다.

성령을 받은 후 가족이 아닌 사도 요한과 함께하며(요 19:27) 아들의 일이 아닌 주님의 일을 하였다. 지속적인 고난이 믿음의 한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마리아를 보라. 그녀는 과거와 현재를 이기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미래로 나아갔다.

기구한 삶이 한계가 될 수 있지만, 성령이 함께하면 넘지 못할 장애물은 아니다. 이제는 성령의 사람으로서 기구한 삶마저도 넘어서라. 기도로 성령의 능력을 얻고 다시 한번 한계를 극복하라. 나의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주변으로 눈을 조금만 돌리면, 기구한 삶을 극복하고 성령에 인도하심으로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는 수많은 사람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멀리 있지도 않다. 바로 당신 교회, 당신 공동체에서 매주 만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제는 당신 차례다. 성령으로 고난의 과거와 현재의 한계를 넘어 미래로 나아가라.

무엇이든지 한계를 극복하면 새로운 미래와 세상이 열린다. 당신의 한계가 매일매일 반복되는 피곤한 일상이든, 최고의 순간에 찾아오는 비난이든, 가장 부족한 자라고 여겨지는 열등감이든, 아니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기구한 삶이든 관계없다. 한계를 극복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오직 주님의 말씀과 계명만 붙들고 나아가라.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에도 한계가 있었지만 주의 계명에는 한계가 없습니다(시편 119:96, 우리말 성경)”

‘얼굴을 계속 햇빛을 향하도록 하라 그러면 당신은 그림자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누가 한 말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말은 한 번도 해를 본 적도 없고, 그림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헬렌 켈러가 한 말이다.

그녀의 현실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암흑이었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이었다. 얼굴을 어느 방향으로 돌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장님이요, 귀머거리요, 벙어리가 그녀였다. 그녀의 현실은 언제나 같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밤이나 낮이나 어둠과 침묵뿐이었다. 그녀의 현실은 평생 변하지 않는 절망이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어둠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어둠 속에서도 해를 발견하였고, 그곳으로 얼굴을 돌리며 현실을 돌파했다.

나에게 빛을 주는 해에 집중하는 것이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때론 그 해가 구름에 가리고, 어둠에 묻혀 있더라도, 매일 해는 뜬다. 그렇다 우리가 매일 현실을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다시 어둠이 오더라도, 매일 해가 다시 뜬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비전을 붙잡고 해가 뜨는 방향으로 계속 걸어라. 그때 최악의 현실도 돌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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