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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아래서](18)
당신만을 위한 사랑을 체험하라

<span style=" font: bold 0.8em Nanum Gothic, serif ; color: green;">[무화과나무 아래서](18)</span> </br><span style=" font: bold 0.5em Nanum Gothic, serif ; color: fuchsia;">당신만을 위한 사랑을 체험하라 </span>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당신만을 위한 사랑을 체험하라

어떤 권사님의 유머다. 첫사랑이 못 살고 있으면 가슴이 아프고, 첫사랑이 잘 살면 배가 아프고, 첫사랑이 같이 살자 그러면 머리가 아프단다. 어이없는 우스갯소리지만, 진리가 숨어 있다. 사랑은 결국 아픔이라는 것이다. 못 살아도 아프고, 잘 살아도 아프고, 같이 살아도 아프다. 사랑이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어야 하는데, 사랑하면 할수록 미워하고, 사랑해서 눈물 나게 하고 눈물 흘리고, 사랑해서 죽이고 죽는다.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 사랑하지만, 결국 아프다.

사랑하는데 아픈 이유가 무엇일까?

사랑받기만 원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 이제는 나의 상처만 생각하는 연민이 아니라, 자기만족이 아니라, 인본주의적 휴머니즘이 아니라, 한번 체험하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

요즘 자녀를 위한 교육 중에서 체험 학습이라는 것이 있다. 교실에서 아무리 개구리 알이 어떻고, 사마귀가 어쩌고 해도, 가보지 않으면 잘 모르고 나중에도 기억 못 한다. 그래서 체험과 경험이 중요하다. 자녀들과 시골이나, 박물관 혹은 바닷가라도 다녀와 본 부모님들은 안다. 부모들은 기억 못 해도, 아이들은 바닷가에서 잡은 지렁이가 어떻게 생겼고, 모래가 어떤지 아주 세세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바닷가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전에 갔던 그 바다 정말 재미있었지, 언제 다시 한번 가자’라고 한다. 체험은 잊을 수 없게 하고 다시 경험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다 한번 경험하면, 잊지 못하고, 항상 경험하고 싶은 것이다.

선물을 받으면 받는 순간에는 너무 기쁘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진 사람을 보면, 비교하게 되고, 내 것이 초라한 생각이 든다. 선물이나 물건을 소유하면 당시에는 만족감이 들지만, 항상 더 좋은 것이 등장하기 때문에 만족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그라진다. 비교대상이 등장하는 순간 우리 선물의 가치도 사랑의 가치도 바로 사라지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명품 선물이 유행이다. 열심히 아르바이트해서 여자 친구에게 명품 가방 하나 선물해도, 여자 친구의 친구가 더 좋은 가방을 받으면 나의 선물과 사랑의 가치는 바로 퇴색된다.

그러나 경험은 다르다. 경험은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경험적 소비가 많이 등장했다. 자녀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보다 함께 여행하는 것을 권한다. 왜 그런가 여행에서 경험한 것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물은 어느 것이 더 좋고 비싼지 비교할 수 있지만, 함께한 시간과 경험한 사랑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고,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오직 나만의 것이라는 의미다. 그렇다 내가 경험하고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나만의 것이다.

당신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증명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당신만을 위한 사랑이다. 눈물, 콧물 흘리면서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때의 경험을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신만을 사랑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고통을 감당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나의 온몸과 마음을 덮어버린 그 사랑, 온몸에 전율이 흐르고, 그 사랑만으로도 내가 세상에서 살아갈 용기가 생겼던 바로 그 사랑 말이다. 그 사랑은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생각하라.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은 고역이었다. 예배라기보다는 설교 비슷한 것을 들으면서 혼나는 경우가 많았다. 시편 23편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본문으로 설명하다가도, ‘주님이 너와 함께 하시는데, 왜 공부를 열심히 안 하니, 성적이 왜 이렇지’ 같은 삼천포로 설교가 흘러가는 때가 많았다. 본문은 성경 말씀이었지만, 적용은 나의 사춘기 태도와 성적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싫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에도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어머니의 기도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사야 42장의 간구다.

‘갈대’는 습지나 물가에 흔한 식물이다. 요단강에서도 많이 자라나는 식물로 바람에 잘 흔들리고 가지가 부러지기 쉬워서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묘사한다. ‘상한 갈대’는 반쯤 부러진 갈대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치명적 충격을 받았거나, 특별히 죄악으로 더러워진 인간을 상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꺾지 않는다. ‘꺾다’는 “솨바르”라는 히브리어로 완전히 망가뜨려 버린다는 의미이다. 상한 갈대는 아무런 이용가치가 없기 때문에 박살 내어버려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는 말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 상태 모든 면에서 절망적인 상황, 비관적인 상황, 사망에 이르는 상황에 처한 우리를 책망하지 않고 다시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사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마치 상한 갈대처럼 세상에서 버림받고 아무런 소망도 기대할 수 없었던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 문둥병자들, 앉은뱅이, 중풍병자, 귀신 들린 자들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치유하며 친구가 되었다.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업신여김을 당하던 사람들이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찾아가서 새 소망을 주고 새 생명을 주었다. 다시 시작하게 하였다. 그것이 당신이 경험한 사랑이다.

‘꺼져가는 등불’은 ‘연기 나는 심지’를 의미한다. 심지에서 언제 연기가 나는가? 생일 케이크를 기억해 보라, ‘후’ 불어서 초를 끌 때 연기가 나지 않던가, 그렇다. 등불은 기름이 없어서 꺼질락 말락 할 때 연기가 나거나, 막 꺼진 후에 연기가 난다. 이런 등불은 빛을 낼 수 없어서 전혀 가치가 없다. 기름 없는 등불은 차라리 꺼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꺼져가는 등불도 소중히 여긴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이거나 시들어버린 사람일지라도 거부하지 않고 사랑으로 용납하여 주신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사랑이다.

또 요한복음 13장 1절의 사랑은 더욱 놀랍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한다고 한다. 이 사랑은 어떤 순간에도 우리가 다시 일어나게 하는 사랑이다. 그러니 용기를 가지고 사랑하라. 우리는 온전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뒤를 든든히 지키고 있다. 이제는 인간적 사랑으로 아파하지 말고, 나만을 위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진짜 사랑을 하라. 늘 나를 사랑하는 주님을 품고 세상에서 비굴하고 쪽팔리게 살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라. 용기를 가지고 진짜 사랑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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