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 목사의 문학의 숲에서 만나는 진리의 오솔길] 오리겐의 “켈수스를 논박함”
강태광 목사(World Share USA대표)
오리겐의 “켈수스를 논박함”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대표하는 초대 교회 교부입니다. 오리겐은 학자였고, 수도자였고, 교회 행정가였습니다. 그는 로마 치하인 185년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독실한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아들 오리겐의 가능성을 보고 오리겐이 어릴 때부터 신앙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리겐은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뛰어난 지도자 클리멘트로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리겐이 17세가 될 때에 세르비안 황제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리겐의 아버지 리오니데스는 이 박해로 참수형을 당해 순교합니다. 당시 순교의 위기를 직면한 아버지에게 가족들 때문에 배교하거나 신앙을 버리지 말고 당당히 순교하라고 아버지를 권면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는 장차 천국에서 만날 것을 고대하며 아버지처럼 자신도 순교하기를 사모하는 표현이 담겨 있어서 주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순교한 후에 어머니와 함께 오리겐이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도움을 받아 오리겐은 신학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곧, 문법을 가르치며 자립을 했다고 합니다. 오리겐은 기독교 신앙 체계를 세우고 평신도들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런 오리겐을 알렉산드리아 교계가 인정합니다. 순교자의 아들이요, 놀라운 지성적 역량과 비범한 신앙의 경건을 높이 사서 기독교 지도자들이 18세의 오리겐에게 알렉산드리아의 세례지원자 학교를 관장하는 임무를 맡깁니다. 이 경험이 오리겐의 신앙 인생에 중요한 기회가 됩니다.
오리겐은 세례지원자들을 가르치면서 신앙의 체계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는데 기독교 내부적인 비판이나 이단의 공격과 주장에도 맞서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신앙을 세우는 학문에 더 열심을 냅니다. 헬라 철학과 히브리어 공부에 박차를 가합니다. 오리겐은 성경을 더욱 열심히 읽고 스승들과 많은 서신을 교환하며 초기 그리스도교와 고대 사상의 조화를 이룬 신학의 체계를 세웁니다.
그런데 그가 40대 즈음에 성직 서품을 받은 데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는 경건한 삶을 사모하다가 스스로 거세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알렉산드리아 주교로부터 성직 서품을 거부당했습니다. 오리겐은 예루살렘 교회의 팔레스타인 가이사랴 주교에게 서품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훗날 교회 정치적, 신학적 정체성에 대한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됩니다.
2세기 후반의 켈수스(Celsus)라는 사람이 기독교를 공격했습니다. 켈수스는 플라톤 학파에 속하면서도 에피쿠로스 학설에 기울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진리”에서 기독교에 대하여 논리적이고 학문적으로 공격을 했습니다. 켈수스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온갖 학설과 풍자와 상식을 다 동원해서 기독교에 대하여 발칙한 공격을 했습니다.
켈수스는 사상이 그리 깊지는 않았지만, 후세의 기독교 반대론자인 볼테르와 시트라우스가 켈수스의 논리를 계속 사용할 만큼 기독교 반대론자들의 원형이 되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켈수스는 날카롭게 기독교를 공격했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약점들을 조목조목 조롱하고 비방했습니다.
켈수스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창조했을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바로잡는 데 관심이 없다는 증거라며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팔레스타인을 약속의 땅으로 결정한 것에 시비를 겁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켈수스는 예수님의 부활도 조롱합니다.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부활했다고 하지만, 누가 살아난 것을 보았는가? 미친 여자와 넋 나간 사람들뿐이다”라며 기독교와 하나님을 공격했습니다.
켈수스가 “진리”로 기독교를 공경할 때 당시 기독교는 당황합니다. 이에 오리겐이 8권짜리 “켈수스를 논박함”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오리겐은 이 책을 통해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성과 성경 속 문자 너머의 상징을 ‘영성주의’적 해석을 통해 켈수스의 공격을 방어하려 했습니다. 이 책에 담긴 오리겐의 신학이 그리스도교의 영성주의의 시초가 되고 오늘날 영해라고 부르는 알레고리적 해석 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리겐은 당시 정통 기독교의 최고 지도자였던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충고와 지원을 받습니다. 켈수스가 자신의 책 “진리”로 기독교를 공격하자 이 공격의 반박을 명석하고 신실한 오리겐에게 부탁하려고 그 발칙한 책 켈수스의 “진리”를 오리겐에게 직접 건네며 반박을 부탁했습니다. 암브로시우스 감독은 성 어거스틴의 스승입니다.
오리겐의 의미는 성경을 역사서가 아닌 보편적인 영성으로 읽었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독창적으로 성경을 접근하는 신학자는 없었고, 사실 시기적으로도 사도 시대 빼고는 얼마 안 된 기간에 성경의 체계가 잡혔으면 얼마나 잡혔을까 싶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오리게네스 같은 영성주의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시대였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오리겐은 켈수스를 반박하고 당시 기독교 진리를 변증하는데 크게 기여했지만, 그의 신학에는 허점이 많습니다. 지금 현대의 신학을 기준으로 보면 반박하거나 교정할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독특한 눈으로 성경을 해석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오리겐의 깊이에 감히 반박하거나 그의 사상을 쉽게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단단한 신학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오리겐은 독보적인 인물입니다. 오리겐은 신학적 업적이나 경건한 삶을 추구했던 그의 영성은 교회사에 길이 빛납니다. 그가 죽은 지 17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영향력은 큽니다. 그의 헌신과 열정이 빚은 기독교 신학과 영적 훈련의 유산은 교회사에 찬란한 별이 되어 빛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