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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광 목사의 문학의 숲에서 만나는 진리의 오솔길] 기독교 문학 산책 – C. S. 루이스의 생애 산책(11)

[강태광 목사의 문학의 숲에서 만나는 진리의 오솔길]  기독교 문학 산책 – C. S. 루이스의 생애 산책(11)

강태광 목사(World Share USA대표)

C. S. 루이스 삶과 사상 산책 (11) 

루이스의 어머니 플로렌스 아우구스타

누구에게나 부모가 중요하지만 C. S. 루이스에게 부모는 매우 중요하다. 루이스는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루이스는 아주 어린 나이에 무한한 사랑을 주셨던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일평생 어머니 사랑을 갈망했던 것 같다. 그의 아버지는 자녀 사랑에 매우 서툴렀다. 어머니는 루이스의 평생 마음에 품었던 갈망 혹은 동경(젠주흐트/Sehnsucht)의 한 부분이다.

C. S. 루이스의 어머니 플로렌스 아우구스타 해밀턴(Florence(Flora) Augusta Hamilton)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앵글로 노르만 가문 출신이었다. 플로렌스 아우구스타 집안은 12세기 이후 대농장을 소유한 농장주로 농업에 종사했다. 농업에 종사하던 그녀의 조상들은 신실한 신앙인들이었고 많은 목회자를 배출하는 가문이었다.

그래서 플로렌스 아우구스타는 목회자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코크 카운티의 퀸스타운에서 태어났고 그녀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토머스 해밀턴은 이미 목회자였다. 1870년 그녀가 8살 때에 그녀의 아버지 토머스 해밀턴 목사가 로마의 홀리 트리니티 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면서 1874년까지 로마에서 머물렀다. 1874년 아일랜드로 돌아온 그는 벨파스트(Belfast) 동부 벨리 해커모어 구역에 있던 던델라 교회의 임시 교구 목사로 일했다. 그러다가 1879년 세인트 마크 교회 교구 목사가 되었다고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전한다.

루이스의 어머니 플로렌스 아우구스타 해밀턴의 집안에는 그녀의 아버지를 포함하여 목회자들이 다수 있었다. 하지만 플로렌스 아우구스타의 개인 신앙에 대해서는 알 길이 묘연하다. 데빈 브라운은 에서 루이스가 자기 어머니의 신앙을 묘사하는 데 어머니의 신앙에 대하여 기억하는 것이 거의 없다고 전한다.

루이스의 어머니 플로렌스 아우구스타는 자기 아버지 토머스 해밀턴이 목회했던 영국 성공회 소속 성 마가 교회(St. Mark’s Church)에서 성장했다. 결혼 후 그녀는 남편과 함께 아버지 교회에 출석했다. 그녀는 자신의 둘째 아들 C. S. 루이스의 유아세례를 아버지 토머스 해밀턴 목사에게 받게 했다. 훗날 루이스의 생애를 다룬 전기 작가들이 성 마가교회 세례자 명부에서 1898년 11월 29일에 출생한 루이스가 1899년 1월 29일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플로렌스 아우그스타 루이스는 아버지를 목회자로 존경했었던 것 같다.

플로렌스 아우그스타 해밀턴은 당시 벨파스트에서 상당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당시 여자들은 웬만해서는 대학에 가지 못하던 때에 벨파스트에 있는 퀸스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당시 여성들에게는 흔하지 않았던 일이라고 한다. 그녀가 대학을 졸업할 때 성적이 아주 탁월했는데, 논리학에서는 최우등, 수학에서는 2등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C. S. 루이스의 아버지 알버트 루이스(Albert Lewis)는 성 마가 교회를 다니면서 목사의 딸인 플로렌스 아우구스타에게 시선과 마음을 빼앗겼다. 성공적인 행정 변호사였던 알버트 루이스는 사랑에 적극적이었다. 앨버트의 적극적인 표현에 플로렌스 아우구스타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알버트 루이스에게 끌렸던 것 같다. 이들은 1894년에 결혼했고 1895년에 첫아들 워런(Warren)을 낳았고 3년 후 둘째인 C. S. 루이스를 낳았다.

알버트 루이스와 플로렌스 아우구스타 루이스는 자녀 교육에 진심이었다. 자녀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통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다. 그래서 그들은 리틀리(Little Lea)의 새집을 책으로 가득한 집으로 만들었고, 두 아들에게 영국식 교육(British education)으로 그들의 미래를 준비시키기 원했다. 이것은 두 아들을 큰 도시, 좋은 학교로 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알버트 루이스의 성공적인 변호사 활동으로 경제적 안정을 누린 덕분이지만, 학창 시절에 공부를 잘했던 플로렌스 아우구스타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루이스 집안이 벨파스트의 새집 리틀리로 이사 온 지 한 달 만에 워런 루이스(Warren Lewis)는 기숙학교로 나갔다. C. S. 루이스는 집에서 어머니로부터 불어와 라틴어를, 여교사 애니 하프로부터 다른 과목을 배웠다.

단란하고 행복했던 루이스 집안의 평화는 루이스 어머니 플로렌스 루이스의 암 진단으로 깨졌다. 그때가 C.S. 루이스가 막 아홉 살이 되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루이스의 어머니는 서서히 죽어 갔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루이스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다. C.S. 루이스는 그때의 충격을 “예기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에서 “어머니의 죽음은 나에게서 모든 평화와 안정감을 빼앗아 갔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C.S. 루이스는 엄마 외에도 사랑받으며 자랐다. 새집으로 이사 가기 전에 살았던 던델라 빌라 생활을 회고하며 루이스는 두 가지 복을 언급한다. 하나는 가족들의 건강을 돌봐 주었던 간호사 리찌 엔디콧(Lizzie Endicott)이었고, 또 하나는 형 워런(Warren)이라고 한다. 루이스가 어린 시절의 복을 회고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언급 대신 간호사와 형을 언급한 것은 이채롭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은 루이스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어머니가 암 진단을 받은 후 어린 루이스는 어머니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사망했다. 어머니 죽음을 보면서 루이스의 믿음이 흔들렸다. 그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거나 아주 무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어머니 죽음이 그의 무신론 여행의 출발점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루이스는 어머니를 어린 나이에 잃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C.S.루이스 자신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지만, 그의 아버지 엘버트 루이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아버지는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아버지 앨버트는 아내를 잃으면서 아들들과의 관계가 어려워져 아버지의 기능을 잃었다. 결국, 루이스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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