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장로직제를 둘러싼 침례교정체성 논쟁” ④ 장로문제를 둘러싼 논쟁의 역사적‧신학적 주장들
조지아주에서 시작되고 진행 중인 장로 직분의 논쟁은 현실적인문제로 시작됐으나 이것이 침례교정체성에 관한 문제라면, 침례교단이 성경 한권을 붙들고 형성해온 정체성의 역사적인 부분과 성경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 되고 있다. 우선 그 역사적인 배경을 통해 형성된 침례교단의 정체성을 살펴본다.
▣ 침례교단의 역사적 기원과 기원 논쟁
19세기 후반의 대다수 침례교인들은 침례교가 주후 30년에 시작됐으며, 그 이후로 단절되지 않은 채 이어져 왔다고 단순히 믿고 있었다. 어떤 이는 침례교단의 기원을 침례요한의 때부터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다. 역사가들은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당시에 각 교단이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신약 교회’임을 증명하기 위해 애쓴 이른바 ‘고교회’(High Church)운동이 있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켄터키주 루이빌에 있는 서든침례신학대학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이하 서든)의 총장이며 교수였던 윗지트(W. H. Whitsitt) 박사는 그런 통설을 거부하고 영국에서 신자의 침수례 행습이 ‘회복됐던’ 1641년이 침례교의 기원이며,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이전으로 기원을 올려 잡으려는 시도는 타당치 못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저술은 곧 미남침례교(SBC) 전체 역사에서 가장 격렬하고 분열적인 논쟁으로 꼽히는 ‘윗지트 논쟁’을 낳았다. 당시 서든은 SBC의 유일한 신학교였다. 윗지트는 당시의 심각한 상황을 맞아 결국 서든에서 쫓겨났다. 이 논쟁은 신학교와 켄터키주침례교주총회, 켄터키주의 침례교 신문인 웨스턴 리코더(Western Recorder)가 함께 맞물려 진행됐다. 서든의 교수들은 만장일치로 자신들의 총장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채택하며 호소했고, 켄터키주침례교주총회는 “SBC가 서든과의 모든 관계를 파
기하라”는 제안을 먼저 받아들였고 더 나아가 윗지트 박사의 사퇴를 촉구했다. 윗지트의 반대파는 서든으로부터 재정을 철회하겠다는 극단적 처방을 제시했다. 결국 1898년 7월 13일 윗지트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사임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점이 있는데, 현재는 윗지트 박사가 주장했던 내용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또 각 신학교에서 교육되고 있다는 것이다.[참고: 지은이 월터 셔든(김용복‧김태식 옮김), 『침례교 신학논쟁』, 침례회출판사]
▣ 침례교인은 무엇을 믿는가?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는 가톨릭과의 성경에 대한 다른 입장을 분명히 했다. 마르틴 루터를 통한 루터교, 같은 시기에 존 칼빈 개혁파의 영향을 받아 존 녹스를 통해 장로교가 형성됐다. 그 후 개신교는 존 웨슬리를 통해 감리교가 탄생하고, 감리교의 영향 속에 웨슬리안 성결운동이 한국으로 전해져 성결교가 탄생하기도 했다. 각 교단은 ‘이신칭의’를 중심으로 복음의 큰 궤를 같이하면서도 서로의 성경에 대한 강조점을 달리하며 교단의 색(色)을 유지해왔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된 17세기에 기원을 두는 침례교인은 무엇을 믿었으며 우리에게 전수된 유산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침례교는 칼빈신학에 기반을 두는 장로교나 웨슬리신학에 기반을 두는 감리교와는 달리 어떤 특별한 신학구조가 없다. 때로는 체계화된 신학적 틀이 없다는 빈정거림을 듣기도 하지만 침례교인은 오직 성경만을 신학과 삶의 규범으로 삼는다는 자부심과 철칙을 갖고 있다.
서든의 학장 및 교회사 교수였던 월터 셔든에 따르면 “침례교인들은 급진적인 상황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투쟁 가운데 형성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투사로 태어난다. 17세기에 영국국교도(영국 감독교인들)는 ‘보수주의자들’이고, 청교도는 ‘자유주의자들’이며, 퀘이커교도, 회중교인들, 침례교인들은 ‘급진주의자들’이었다! 생각해 보라! 침례교인들은 현상유지를 원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아니었다. 또한 그들은 현상유지와 타협하여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했던 선구적 자유주의자들도 분명 아니었다. 그들은 종교적 체제를 바꾸고자 했던 급진적인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중한 유산이다!”라고 침례교 선조들의 유산에 대해 설명한다. 계속해서 그는 17세기에 침례교인들은 ‘비열한 분파’, ‘저질의 패륜아’, ‘미혹되고 … 망상에 빠진 어린이와 노예와 백성들로 구성된 분파주의적 폭도’, ‘속되고 신성모독적인 분파’, ‘불순하고 세속적인 분파’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으로 불리고 ‘무정부주의자’로 간주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침례교인들이 영국과 미국에서 두 가지 커다란 잘못을 범했다는 비난 때문이었다. 하나는 신학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침례교인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이단적인 사상이요 비난받을 만한 행동으로 간주했다.
그 잘못의 첫째는, 침례교인들은 세례를 통해서 기독교에 입문한다거나 혹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신념을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이단으로 몰렸다. “기독교인의 제자도는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행동, 즉 선택을 포함하는 삶의 한 양식이다.” 침례교인들은 이러한 자명한 신학적 원리(theological axiom)로부터 출발해 유아세례를 거부했다. 신자의 침례(Believer’s baptism)‧신자의 교회(Believer’s church), 이것이 가장 중요한 침례교인들의 정신이었으나 당시에 유아세례의 전통에서 보면 명백한 이단사상이었던 것이다. 유아들이 관수례를 받아서 문제가 아니라 침례교회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결정해야만 했고, 반면에 교구 교회의 회원은 비자발적으로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침례교회사 교수인 W. T. Whitley 박사는 “침례교인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교회론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하기로 작정한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둘째는 침례교인들은 정교분리를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17세기의 대부분의 영국 사람들은 영국 국교회와 신학적으로 의견을 달리하는 것을 영국 국가에 대해 정치적으로 반역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침례교인들은 국가가 인간의 영혼 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정치와 교회가 뒤섞이지 않도록 노력했다. “하나의 신조를 강요하는 것은 영혼을 강간하는 것이다!” 침례교인들은 이 말에 동의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국가가 신조를 강요하는 것은 성적 폭력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침례교인들은 법을 파괴했다. 그들은 영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법을 파괴했다. 그 법이 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들은 성경의 법을 따라서 종교적인 자유를 억제했던 시민법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침례교인들은 ‘법’이나 ‘신조’라는 틀을 강요하는 것에 본능적으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침례교인들이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사도신경의 내용-내용에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성경 말씀이 아니라서 바뀔 수 있는) 사람이 만든 신조를 강요하는 것에 거부감을 갖기 때문인데, 이는 우리의 자유정신에 기초한다. 그래서 침례교인들은 사도신경을 거부한다며 이단으로 오해받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결국 침례교인들은 저항의 대가를 지불했다. 국가에 피를 흘리며 저항해야했고, 이단으로 정죄받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핍박을 받아야 했다. 이것이 침례교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른바 ‘피흘린 발자취’인 것이다. 침례교인은 비자발적인 ‘교구’ 교회를 반대하고, 믿는 자의 침례를 통한 교회의 개념을 수호하며 죽어갔다. 또한 침례교인은 종교에 대한 국가의 강요를 반대하며 죽어갔다. 왜냐하면 인간 영혼의 자유가 지켜져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 제도가 개인보다 우월하다는 사상에도 반대했다. 왜냐하면 개인의 신앙양심이 우선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참고: 월터 셔든, 『침례교 신학논쟁』]
장로직제의 논쟁을 놓고 역사적인 배경을 말하던 한 목회자는 “생각해보라, 피흘린 발자취는 ‘두 직분’을 지키려다 흘린 피인가? 아니면 ‘신앙의 양심과 자유’를 위해 흘린 피인가?” 또한 “한국 침례신학대학교의 교훈(校訓)은 ‘진리, 중생, 두 직분’인가? 아니면 ‘진리, 중생, 자유’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신앙의 양심과 자유’ 이것은 침례교회에 혈액처럼 흐르는 정신이다. 그렇게 법이나 틀의 강요를 거부했던 침례교인이었으나 자신들의 신앙정신을 ‘신앙고백서’라는 형태로 정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 침례교인의 정체성을 담은 ‘신앙고백서’의 변천
신앙고백서는 영국에서 먼저 시작됐지만 되도록 우선 미국의 역사에 한하여 고찰해본다.
교회사 교수이며 한국의 강남중앙침례교회를 담임하는 피영민 목사는 자신의 글 ‘필라델피아 신앙고백서에 관하여’(은혜지)에서 “1639년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에 의해서 최초의 침례교회가 미국 땅에 설립된 이후로 17세기 동안 침례교회는 번창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미국 북동부인 뉴잉글랜드 지역은 회중교회가 국교회였기 때문에 침례교인들을 극심하게 핍박하였기 때문이었다. 17세기말에 이르러 비교적 종교의 자유가 많았던 중부 식민지에 침례교인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필라델피아 지역에 침례교인들이 많이 개척되기 시작하였는데 1688년에 필라델피아 근교인 페니펙(Pennepek)에 엘리아스 키취(Elias Keach)가 개척한 페니펙 침례교회가 그 효시였다. 그의 아버지도 영국 런던에서 유명한 침례교 설교자인 벤자민 키취 목사였다. 엘레아스 키취는 전도정신이 강하여 필라델피아 근처 여러 마을에 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돌아가면서 예배를 인도하였는데 독립된 교회들 간에 유대와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 1707년에 필라델피아 지방회를 구성하였다. 이것이 미국 땅 최초의 지방회이자 추후 설립되는 지방회의 모델이 되었다.”라면서 “필라델피아 지방회는 1742년에 이르러 공식적인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였다. 이것이 필라델피아 신앙고백서인데, 그 내용은 영국의 특수침례교회가 채택한 1689년의 제2차 런던신앙고백서와 동일한 것이었다. 단지 두 개의 규정만 첨가되었을 뿐인데 하나는 회중 찬송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합당한 제도라는 점과 다른 하나는 침례받은 신자들은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전에 전교인 안수를 받는 제도를 도입한 것이었다. 필라델피아 신앙고백서는 향후 설립된 지방회들이 공식적인 신앙고백서로 채택되었고 모든 신앙고백서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을 크게 미친 고백서가 되었다. 침례교회의 독특성을 포함해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최고의 요약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침례교인들은 자신들의 믿는 바와 생활양식을 요약 정리한 ‘신앙고백서’를 채택해왔다. 그렇다면 장로직제의 쟁점에 대해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1742년의 필라델피아 신앙고백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교회론 부분과 협력관계의 부분을 살펴본다.
[필라델피아 신앙고백서 – 제 26 장 교회에 관하여]
-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모여지고 완전하게 조직된 개별적인 교회는 직분자들과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직분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받고 교회에 의해 구별된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시거나 요구하시는 특별한 명령과 의무 혹은 능력을 행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아 세워진 자들이다. 이들에는 세상 끝까지 계속될 것으로 목사 혹은 장로와 집사가 있다(행 20:17,28; 빌 1:1).
- 성령이 충만하고 은사가 있는 어떤 사람을 불러 교회에서 목사나 장로로 세우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방법은 각자의 교회에서 일상적인 투표를 통해 선택하는 것이다(행 14:23). 교회는 기도와 금식을 통해 엄숙히 선별해야 하며, 만일 이미 조직되어 있다면 장로회의 안수를 통해 구별해야 한다(딤전 4:14). 집사도 동일한 투표를 통해 선택을 해야 하며 기도와 동일한 방법의 안수를 통해 구별되어야 한다(행 6:3,5,6).
이때도 장로와 감독과 목사는 하나라는 개념은 변함이 없다. 목사와 장로를 같게 표현했고, 집사를 구분해 교회에는 두 직분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15번 항목도 눈에 띤다.
- 교리나 행정에 있어서 어려움이나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이런 문제들은 교회의 전체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혹은 개별 지역교회의 평화나, 일치나 혹은 교육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혹은 개별 성도가 교회에 해를 입힌 경우에 교회의 권징 절차가 진리와 질서에 어긋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함께 교제하는 교회들이 대표자를 파견하여 문제의 차이점을 함께 생각해 보며 적절한 충고를 하고(행 15:2,4,6,22,23,25) 모든 교회가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신 바이다. 그러나 파견된 대표자들은 개별 교회나 사람에 대해 이른바 교권을 부여받은 것도 아니며, 교회 일반에 대한 사법권을 부여받아 교회나 개인에 대해서 그 권한을 행사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들의 결정을 개교회나 개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고후 1:24; 요일 4:1).
교회론에서 15번의 항목은 교회와의 교리나 행정에 어려움이나 차이가 있을 때 대표자를 파견해서 적절히 충고하지만, 파견된 대표자들은 개별교회나 사람에 대해서 권한을 행사할 수 없으며 그들의 결정을 개교회나 개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최초의 지방회 필라델피아지방회가 채택한 신앙고백서는 오늘날 미남침례교단(SBC)가 채택하고 있는 신앙고백서에도 기초가 된다.
다음은 SBC가 채택한 교회론에 대해 1925년, 1963년, 2000년에 채택한 변천과정이다.
다음은 SBC가 채택한 협력(Co-Operation)에 대해 1925년, 1963년, 2000년에 채택한 변천과정이다.
XIV. 협력 (2000년 채택 메시지)
경우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 가장 잘 협력할 수 있도록 지방회 또는 총회를 조직해야 합니다. 그러한 기관들은 서로 다른 기관에 대해서 혹은 지역교회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기관들은 우리 침례교인들의 능력을 가장효과적인 방법으로 끌어내고, 연합하고, 인도하기 위하여 설계된 자발적인 자문 단체들입니다.
신약교회의 회원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하기 위하여 선교적, 교육적, 그리고 자선 사역들을 펼쳐 나가는 데 있어서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연합이란 공동의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그리스도의 백성의 모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영적 화합과 자발적인 협력을 의미합니다.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 그 자체가 정당한 것이며 교단 간의 협력이 양심에 어긋나지 않거나 그리스도와 신약성경에 계시가 된 그분의 말씀에 대한 충성을 타협하지 않을 때는 여러 다른 기독교 교단 간의 협력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17:12; 18:17; 사사기 7:21; 에스라 1:3-4; 2:68-19; 5:14-15; 느헤미야 4; 8:1-5; 마태복음 10:5-15; 20:1-16; 22:1-10; 28:19-20; 마가복음 2:3; 누가복음 10:1; 사도행전 1:13-14; 2:1; 4:31-37; 13:2-3; 15:1-35; 고린도전서 1:10-17; 3:5-15; 12; 고린도후서 8-9; 갈라디아서 1:6-10; 에베소서 4:1-16; 빌립보서 1:15-18.
쟁점이 되는 부분만을 살펴봤으나 피영민 목사는 자신의 필라델피아 신앙고백서 해설에서 ‘신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관하여’를 다룬 21장도 침례교의 핵심정신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고백서는 하나님만이 사람의 양심의 주가 되신다. 1)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배치되거나, 혹은 말씀이 포함하고 있지 아니한 사람들의 교리나 명령들로부터 인간의 양심을 자유케 하셨다. 2) 그러므로 그와 같은 교리를 믿거나 혹은 그와 같은 명령에 양심을 어기면서 순종하는 것은 참된 양심의 자유를 위반하는 것이다. 3) 그리고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거나,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과 아울러 이성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피 목사는 계속해서 “역사 속에서 인간의 양심의 자유는 두 가지 방면으로 위협을 받았다. 하나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취했던 것처럼 인간 양심에 교권이 지나친 권위를 가지고, 성경에 없는 교리나 명령을 만들어서 맹목적인 신앙을 요구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이 원했던 것처럼 국가의 권위를 지나치게 확대하여 신자들의 신앙내용을 통제하고 획일화하여 국가교회 제도를 만들려고 한 것이었다. 루터나 영국 성공회의 헨리8세의 수장령이 그런 경우였다. 그러나 개혁교회와 침례교회는 이 두 가지 위협을 거부하고 하나님과 각 개인의 신앙 양심 사이에는 교권도 개입할 수 없고, 국가도 개입할 수 없음을 선언한 것이다. 이것이 양심의 자유이다.”라고 말한다.
■ 제안 또는 대안(1) – “이제 드러내서 정체성을 논의할 때다”
앞서 침례교인들의 신앙고백의 기원에서부터 2000년 신앙고백서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하게 흐르는 침례교정신은 ‘진리를 추구하는 양심과 자유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국교도 국가도 어떤 단체도 결코 침례교인들을 하나의 틀에 가둘 수 없었다.
침례교인들이 유일한 진리의 토대로 여기는 성경에서 감독과 장로와 목사 세 단어를 하나의 직분에 혼용해서 사용했으므로 교회의 직분에는 목사와 집사가 있다는 주장은 변함없다. 또한 개교회의 자율성을 어느 단체도 침범할 수 없다는 것도 명시하고 있다. 현재 SBC의 홈페이지 FAQ 게시판에서 장로문제와 의식 등의 모든 문제는 개교회의 자율에 맡길 일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정신의 흐름에서 보아야 한다는 해석이다.
다른 교단과의 구분에서 침례교의 특징을 말할 때, 단편적으로 ①유아세례 거부 및 침수침례 고수(신자의 교회) ② 정교분리 강조 ③두 직분(목사와 집사) ④ 사도신경 거부 ⑤ 여성목사 거부 ⑥ 설교 후 초청 등이 있다. 이러한 특징은 하루아침에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온 침례교정체성인 것이다.
침례교회사 전문가들은 현재 이런 다양한 특징이 침례교회 안에 존재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유정신’이라고 강조한다. 두 직분은 전체 신앙고백서에 단 1줄만 나오지만 ‘자유정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백서에 녹아있고 또 구체적으로 언급된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피 흘린 발자취’는 두 직분을 고수하다가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저항하고 피를 흘린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런 자유가 있어도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린도전서 10:23)의 말씀처럼 자유를 절제하는 미덕을 보인 것도 침례교인이라고 말한다.
두 직분을 고수하는 것은 침례교회로서 당연하고, 현재 미주 한인침례교회들 대다수가 그 특징을 지켜가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익숙하고 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맞기 때문에 다른 한인침례교회가 성도의 장로직분을 두는 것으로 인해 혼란이 생기고, 거부감이 드는 것은 필연적인 반응이다. 그래서 그동안 개교회가 자율적으로 장로직분을 둘 때, 교회는 많은 고민 속에서 보이지 않게 진행해왔으며 때로는 지방회가 교회에 제재를 가하기도 한 것이다.
이 논쟁을 지켜보는 목회자들은 “침례교가 성경적인 직분은 목사와 집사로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여자집사, 서리집사, 전도사, 권사, 장로, 목자, 목녀, 초원지기 등 교회 내에 다양한 직분이 있는 것도 분명하다. 더구나 장로를 세웠다고 지방회가 개교회를 제재한다는 것은 장로를 두는 문제보다 훨씬 심각하게 정체성에서 어긋나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일로 계속해서 갈등을 야기할 것이 아니라 속히 SBC처럼 어떤 식으로든 견해를 모아야 한다”라며 이제는 이 문제를 묻어둘 것이 아니라 정체성 확립과 공개적인 논의가 필요한 일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 제안 또는 대안(2) – “세미나 형식 or 패널형식의 토론이 필요하다”
계속해서 목회자들은 “이것은 갑론을박할 하나의 이슈가 아니라 개교회의 자율성과 지방회의 자치권, 침례교 신학의 전통과 목회의 현실, 성경적인 해석의 문제 등이 모두 관여된 것이기 때문에 입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시간을 갖고 세미나 형식의 주제 강연 및 Q&A를 통한 토론이나 토론자들을 선정해 패널 토론 및 Q&A 등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떻겠느냐”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장로직분을 둘러싸고 미주 한인침례교회가 어떻게 갈등을 종식시키고 결론에 도달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미주=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