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서 (5)]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주일 오후 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등장부터 심상치 않았습니다. 표정부터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아픔과 상처가 있다’였습니다. 사실 무엇 때문인지 살짝 짐작이 가기는 했지만, 섣불리 질문해서 나의 짐작을 들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일단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습니다. 어느 정도 들으니, 저의 짐작이 맞았다는 생각과 어떻게 잘 격려해 줄까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그의 표정은 실연당한,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오랜 짝사랑 끝에 고백했지만, 퇴짜 맞은 사나이의 표정이었습니다.
그날 그 친구가 저에게 물었던 질문은 대충 이런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면서요? 정말 용기 내어서 사랑을 고백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요? 오랜 기간 고백할 수 있는 용기 달라고 기도했고, 정말 용기를 내어서 고백했는데 어떻게… 어떻게,,.”
자세한 내용을 들어 보니, 청년부에 한 자매가 있었고 그 친구에게 좋은 느낌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형제가 숫기가 없기 없다 보니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용기 내는데도 더 많은 시간이 결렸다고 합니다.
정말로 말투와 표정에서 얼마나 그 자매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혼자 키워왔을 그 사랑의 깊이도 너무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을 그 자매에게 전했더니, 돌아온 답변은 매몰찬 거절이었답니다. 형제가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고, 비전도 너무 다르다는… 매몰찬 거절 ….
“목사님 용기를 내었는데….”
“용기를…. ”
“너무 힘들고 낙심됩니다.”
“정말 제가 그렇게 부족한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했는데 여기서 용기가 뭘까?”
“마음에 든다고 고백하는 게 용기일까?”
“용기 내서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용기일까?”
“여기서 용기는 나의 마음을 전하고자 용기 내는 그런 용기가 아니라, 어떤 시련 속에서도 나의 사랑을 지키는 용기고, 인내할 수 있는 용기에요. 정말 그 자매가 형제의 사랑이라고 믿는다면, 그 친구를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해요”라고, 집착이 아닌 변하지 않는 사랑을 지킬 용기가 필요하다고 격려하여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
‘그럼 믿음은 뭐지?’
믿음에 적용하면, ‘믿음 있는 자가 복을 얻는다.’ 인가!
그럼 믿음은 ‘고난 가운데서도 기도하는 믿음’, ‘두려움 가운데서도 인내하는 믿음’, ‘연단 가운데서도 순종하는 믿음’, 이것이 용기 있는 믿음이고 진정한 믿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이암아 살리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브리서 10:36-39)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은 고난을 두려워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고난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우리 믿음은 축복을 얻는 도구가 아니라, 고난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인내하고 견딜 수 있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용기 있게 세상을 살 것이고, 당당하게 맞서 싸울 것입니다.
이런 용기를 갖고 믿음으로 사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