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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호프 커뮤니티 난민 선교(7)

방과후학교

시티호프 커뮤니티 난민 선교(7) </BR></BR> 방과후학교

 

/ 대표: 김지선, 영어명 Lori Kim

주영이와 한 봉사자 청년이 함께 방과후학교 시작을 위하여 준비하고 계획하였습니다. 방과후학교를 어떤 방식으로 운영할지 학교 숙제 외에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지, 봉사자 모집과 관리에 대하여 여러 미팅을 거듭하며 철저히 준비하였습니다. 봉사자들이 학생들을 지도한 후 학생의 학습 향상을 기록하는 시스템도 잘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봉사자들과 난민 학생들의 관계성을 중시하는 방과후학교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몇 년 후 난민 학생들에게 시티호프의 방과후학교가 왜 좋으냐고 질문했을 때 학생들의 대답이, 다른 방과후학교는 그냥 공부를 도와주는 학교의 연장인데, 시티호프 방과후학교는 가족에게 오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방과후학교에서 봉사자들이 난민 학생들을 동생처럼 아껴주며 사랑하는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학생들에게 장차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많은 학생들이 자신을 가르치는 그 봉사자같이 되고 싶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방과후학교를 시작할 때 저희들이 그동안 섬긴 가정의 자녀들이 많았기 때문에 학생들을 특별히 모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장소는, 난민가정 응접실에 한국 자개 밥상 세 개를 펴놓으면 훌륭한 방과후학교로 변신하였습니다. 대학생 봉사자들이 충분하여 저는 별로 할 일이 없어 간식을 준비하여 방문하였습니다. 난민가정 응접실을 쓸 수 있어 좋았지만 한 가지 흠은 바퀴벌레였습니다. 요즘은 난민들이 사는 아파트에 정기적으로 약을 쳐서 바퀴벌레가 줄어들었지만,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난민가정에 바퀴벌레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제가 난민가정을 방문하면 응접실 여기저기에 바퀴벌레가 기어 다녔는데 집주인들은 보고도 벌레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죽이지 않으니 제가 신발로 죽일 수도 없고 제 곁에 다가올까 봐 제 핸드백에 들어갈까 봐 신경이 곤두섰던 적이 많았습니다. 저희가 방과후학교로 모이는 난민가정에는 바퀴벌레 폭탄을 여러 개 터트려 모두 전멸시켰습니다. 그러나 며칠도 안 되어 옆집에서 또 몰려오기 시작하여 그야말로 바퀴벌레와의 끝없는 전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여름방학에는 방과후학교의 청소년들을 위하여 4주간 여름캠프를 하였습니다. 캠프의 마지막 일정으로 사바나 바닷가에 2박3일 여행을 떠났습니다. 첫 번째 여름은 23명의 청소년들이 바다를 난생처음 보는 날이었습니다. 모두들 너무 좋아 도착하자마자 다들 물속에 뛰어들었습니다. 학생들이 모두 수영복이 없는 탓에 초라한 평상복 차림으로 물속에 들어갔고, 긴치마와 히잡을 쓴 회교도 여학생들도 그대로 물속에 뛰어들어 몇 시간을 물속에서 놀았습니다. 피서객들이 저희들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는데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한 명씩 다가와 저희에게 어디서 온 그룹이냐고 물었습니다.

저희 방과후학교의 첫 번째 학생들은 르완다에서 온 7학년과 8학년 ‘무호지’와 ‘무호자’ 형제였습니다. 그들이 미국에 처음 도착하였을 때 저희 봉사자가 그 가정을 섬겼습니다. 그 형제들은 대학 갈 때까지 몇 년 동안 방과후학교에 거의 빠지지 않고 나왔습니다. 그들의 대학 진학을 위하여 청년 봉사자가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SAT를 가르쳤고 형 무호지는 전교 2등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빌 게이츠 전액 장학금을 받고 조지아대학(UGA)에 진학하였습니다. 무호지는 지금 어느새 22살 청년이 되었고, 재정을 전공하여 6개월 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좋은 직장이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동생 무호자는 조지아주립대학에서 컴퓨터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두 형제는 청소년 시절 자신들이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았던 이유가 방과후학교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호지는 몇 년 후에 시의원, 그리고 시장에 출마하여 클락스튼을 좀 더 나은 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꿈꾸고 있습니다.

저희가 여러 아파트 단지에 방과후학교를 하면서 근처 인디안 밸리 아파트에는 방과후학교를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대낮에도 권총 강도당하는 위험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방과후학교를 위하여 봉사하는 대학생의 안전이 제게 우선순위였습니다. 그래서 위험한 아파트 단지에는 절대적으로 방과후학교를 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저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저희 봉사자가 섬기던 한 버마 회교도 가정이 그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 버마 가정은 엄마가 오래전에 돌아가시고 아빠와 초등학생, 중학생 딸들 네 명이 살았는데 그 아이들은 제가 특별한 마음으로 돌보던 아이들이었습니다. 아빠는 이른 오후에 닭공장에 일하러 가고 새벽녘에 돌아와 방문하면 항상 아이들만 있었습니다. 때로는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사 간 아파트를 처음 방문하였을 때 아이들이 제게 숙제를 도와달라고 하였습니다. 숙제를 도와주고 작별하고 나오는데 다음날도 와서 숙제를 도와달라며 간청하였습니다. 숙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거절을 못하여 하루 이틀 가서 숙제를 도와주다 보니 어느새 옆집 애들도 한 명씩 숙제를 들고 몰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 숫자가 15명이 되었습니다. 대낮에도 위험하다는 아파트 단지를 매일 오후 방문하여 해질 때까지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고 해가 지고 난 후에야 떠나는 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저희가 위험하여 가지 않으려던 그 아파트 단지에 하나님께서는 제가 사랑하던 아이들을 그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보내셨습니다. 그 가정으로 인하여 그 아파트 단지가 저희들의 사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훗날 갱단 사역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시티호프가 감당해야 할 일들을 미리 만들어 놓으시고 저희를 그 아파트 단지로 인도하신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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