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희 사모의 가정상담칼럼] 문제를 드러낼까, 넘어갈까?
심연희 사모(RTP 지구촌 교회, Licensed Marriage and Family Therapist)
상담소를 찾은 C 씨는 교회 갈 때마다 자신을 싫어하는 듯 보이는 한 할머니가 신경 쓰인다고 했다. 이유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하고는 인사도 잘하고 말도 잘 섞으면서 유독 자신만은 경계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한 번은 자신을 말없이 지나쳐가려 하길래 얄미운 마음에 일부러 길을 이리저리 막아 앞서 가지 못하게 했다나… 그 할머니와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괜스레 내 흉을 보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생겼다. 그 할머니가 신경이 쓰여 교회를 나가는 것이 시큰둥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다른 교회로 옮겨볼까 생각도 했다. 참다못해 한번은 작정하고 따져 묻기로 했다. 도대체 왜 자기를 싫어하냐고 대놓고 물어보겠다며 씩씩댄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할머니가 정작 자기를 싫어하는 것인지,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을 가리는 것인지조차 확신이 없다는 데 있었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열은 받는데 뭐라고 따져야 할까?
얼마 전 ‘언니의 따끈따끈한 독설’이라는 짧은 강의를 유튜브에 연재하는 한 강사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중 한 강의의 주제는 ‘은근히 나를 싫어하는 사람 상대하는 법’이다. 언제나 칭찬받고 싶고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은 비단 크리스천이고 사역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랑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욕구는 인간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내재되어 있는 욕구이다. 그런데 현실은 때로 내가 천사로서의 역할을 지속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이 ‘은근히 나를 싫어하는 사람’의 존재는 집안에서건 교회에서건 직장에서건 심심치 않게 떠오른다. 모든 사람이 날 좋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은근히 나를 싫어하는 사람의 기운이 느껴지면 신경에 거슬리게 마련이다. 강사는 그 사람이 가끔 명절에 보는 동서일 수도 있고 때로 나를 섭섭하게 하는 누군가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시어머니나 며느리일 수도 있고 교회에서 같은 소그룹의 일원일 수도 있다. 우리가 속한 교회에 가면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모두를 용납하고 사랑해야 당연하지만, 그것이 정말 힘들어서 더 괴로운 현장이 되기도 한다. 고작 그 한두 명이 은근히 나를 싫어하는 느낌이라는 것이 참 이상하게도 열 명의 호감보다 더 센 전파를 쏘기도 한다. 예배에 집중이 안 되는 것은 엄청난 재난이 닥쳐서가 아니다. 은근히 나를 싫어하는 듯한 한 명의 뒤통수만 있어도 우리의 마음은 쉽게 흐트러진다.
이 강사는 은근히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작은 적’이라고 정의한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작은 적’은 평소에 나와 잘 안 맞는 사람이지만, 그다지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도 아니란다. 그래서 ‘작은 적’은 신경은 좀 쓰여도 옆에 두고 살만 하다는 것이다. 동서가 마음에 좀 안 들어도 나 사는 데에 별반 큰 지장이 없는 것과 같다. 잘 안 맞는 사람이라도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여선교회에서 같이 봉사할 수 있다. 내 옆에 늘 존재하는, 하지만 굳이 싹을 잘라내야 하는 누군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작은 적’이 ‘큰 적’으로 돌변하는 것이 한순간이라는 점이다. 어느 순간 별것 아니었던 작은 적이 큰 적으로 떠오르면, 이 큰 적과는 더불어 살수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 변화의 순간은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겠다는 작정에서 시작된다. 그저 좀 섭섭하고 좀 마음에 안 들던 상대의 모습에 대해 작정하고 한마디 해주게 되는 순간, 이 작은 적이 큰 적으로 진화한다. 마음에 있던 거슬리는 부분이 입 밖으로 나오게 되면서 공식화되고 문제화된다. 전에는 그저 좀 신경에 거슬리던 사람이 작정하고 한 한마디 이후에는 얼굴도 쳐다보기 싫고 말도 섞기 싫은 웬수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동서가 좀 거슬리지만 명절 후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흉 좀 보고 넘어갔던 상황은 동서에게 작정하고 한마디 하는 순간부터 돌변한다. 상대가 미안하다고 해도, 말을 꺼낸 사람은 시원하기보다는 심했나 걱정도 되고 후회도 된다. 상대가 너나 잘하라는 식으로 맞붙으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얼굴 보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이상하게도 어른이 되고 나이가 먹어가며 더 흔해진다. 더 이상 그 작정한 한마디가 서로 너그럽게 용서되거나 쉽게 잊히는 나이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강의에서 제시하는 결론은 그냥 그 작은 적을 내버려두고, 봐주며 살라는 것이다. 괜히 작정하고 한마디 해준 다음에 큰 적으로 돌변한 상대는 감당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늘 어떻게 해야 건강하게 대화하며 갈등을 풀어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상담자나 목회자의 가치에 반하는 주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주제는 분명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며 지내야 하는 가족 안에서, 혹은 교회 안에서 심심치 않게 만나는 불편한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내 마음에 안 드는데, 나를 마음에 안 들어하는 것 같은데 말을 해서 풀어야 할까, 모르는 척 놔두어야 할까? 문제를 드러내야 할까, 넘어가야 할까? 작은 적을 두고 살아야 할까, 말해서 더 가까워질지도 모르는 계기를 만들어야 할까?
분명한 것은 부정적인 이야기일수록 훨씬 더 조심스럽고 더 많이 고민한 후에 꺼내야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나 마찬가지로 가까운 가족에게나 오래 함께 신앙생활해서 정말 허물없는 교인에게나, 부정적인 한마디는 칭찬보다 몇 십배 몇 백배 생각하고 기도하며 건네야 한다. 이런 고민과 숙고가 없이 욱해서 내뱉은 한마디가 그저 나랑 잘 안 맞았던 상대에서 나와 절연을 해야 할 상대로 변하게 한다. 109편의 시편 기자에게도 우리와 같은 고민의 흔적을 본다.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3,4).” 너무 속이 상해 차마 사람 앞에서는 입에 담지 못할 저주의 말을 하나님 앞에서 토로하지만, 그는 맞서기보다 기도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문제를 드러내서 해결하고 치유해야 한다. 그때를 놓쳐서 사람을 잃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번 찾아가서 만날 중요한 때를 놓쳐서 평생을 등지는 관계를 만드는 실수도 종종한다. 부부의 관계나, 자녀와의 관계, 믿음의 친구와의 관계도 그때를 놓치면 관계가 소원해진다. 그러나 잘못 말하면 관계가 틀어진다. 문제를 드러내기 전 열심히 고민부터 해야 한다. 그 문제를 만들어낸 것이 나 자신은 아닌지,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상대를 평가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 정말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진정성 있는 충고인지 먼저 살펴야 한다. 내 마음을 살피는 과정이 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는 좋은 조언일지라도 잘못 전달되기 쉽다. 흔히 대인관계에서 내가 문제 삼지 않은 문제는 시간이 좀 지나면 잊히거나 넘어가지기 쉽다. 그런데 심사숙고 없이, 충분한 기도의 과정 없이 드러낸 상대의 부족함은 상처만을 남기기도 한다. 문제를 드러내는 대화의 시작은 고민에서부터다. 혼자 하나님께 의논하는 기도에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