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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스턴 칼럼-안지영] 교회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1)

[미드웨스턴 칼럼-안지영]  교회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1)

안지영 목사 (나눔교회 은퇴목사/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부교수)

[미드웨스턴 칼럼-안지영] 교회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1)

내가 교회를 다닐 때, 교회가 강조했던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 문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 ‘하나님 중심’은 나의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게 마땅하다 여겼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는 기독교이기에 ‘말씀 중심’ 또한 당연하다 여겼습니다. 그러나 ‘교회 중심’은 좀 달랐습니다. 왜 교회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대개는 교회가 신앙생활의 핵심이 되는 걸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왜 존재해야 하는지 아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나와 함께 한 지체들과 성경공부를 통해서 세워진 교회가 세 군데입니다. 한국에 하나, 파푸아뉴기니 움볼디 마을에 하나, 그리고 달라스에 하나, 이렇게 세 곳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내가 처음부터 교회를 개척하겠다는 계획을 세워서 시작된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다가 보니 주님의 말씀을 깨달은 소그룹 지체들이 자발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세운 겁니다.

하지만 정작 이렇게 교회를 세우는데 촉매 역할을 한 나는 교회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아니 함께했던 우리가 모두 교회에 대해 명확하게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교회 건물을 교회라 생각했고, 어느 정도 신앙 연륜이 생기고 난 후에는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공동체를 뜻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하는 여러 활동이 곧 교회가 하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예배, 교육, 봉사, 선교, 교제가 건강한 교회라면 갖춰야 할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과 각 지체가 그리스도 몸의 일부로서 자신의 은사를 따라 서로를 세워가는 공동체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잘 수행할수록 좋은 교회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목회하면서도 교회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교회 개척 준비를 위해 모여서 읽었던 책 중에 하나가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교회”였습니다. 그는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함이다 (예배)

둘째,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함이다 (전도)

셋째, 하나님의 백성과 교제하기 위함이다 (교제)

넷째, 하나님의 백성을 교육하기 위함이다 (제자훈련)

다섯째,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사역/봉사)

릭 워렌은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위의 다섯 가지를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데, 나는 무언가 더 근본적인 게 빠져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려는 궁극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과 교제의 그 끝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을 교육하는 제자훈련의 궁극적 목적은 어디를 향하는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다섯 가지 목적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하는데, 무언가 2%가 모자란 것 같았습니다. 위의 다섯 가지가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라는데, 더 근원적인 교회의 존재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 궁극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회는 예배하고 전도하고 교제하며 훈련하며 사역해야 한다는 거지요. 나는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나는 이 질문을 참 오랫동안 지닌 채 선교 사역을 하고, 목회 사역을 했습니다. 30여 년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상태로 보낸 거지요. 선교사로 있을 때도 선교는 교회가 해야 할 마땅한 의무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신약 성경을 번역하면서 바울 서신서와 복음서가 서로 공통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성경 번역을 하려면 먼저 성경 해석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해석의 결과를 가지고 과하티케 부족어로는 그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표현을 찾아내는 게 그다음 과정이지요. 그러고 나서 그 부족어 번역이 부족 사람들이 정확히 이해했는지 조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정확한 의미 전달만 아니라, 그 전달이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표현되었는지 살펴야 하지요. 이런 조사를 하기 위해 다양한 확인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렇게 신약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 중에 복음서와 바울 서신서 사이에 큰 간격이 있는 것을 보게 된 겁니다. 복음서에 등장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 바울의 가르침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바울도 이적을 행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서로 공통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 가르침을 들여다보면, 분명 서로 연결점이 없어 보였지요. 다시 말해서, 복음서에서 서신서로 넘어가는 흐름이 원활하지 않다는 거였습니다. 둘 사이에 연결점이 보이질 않는 겁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공생애 출발 때부터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니 회개하라”는 메시지로 시작해서, 그 나라가 어떤 속성을 가진 나라인지 공생애 마지막 때까지 그 나라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서신서 여기저기에 산발적으로 나타날 뿐, 그것도 그 나라에 관한 설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관심을 두었던 것은 오로지 ‘교회’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서에는 인간의 삶의 현장이 보이는데, 서신서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단지 교회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서신서 설교 대부분은 교회에 관한 것이고, 사역도 교회에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서신서는 성도의 일상생활보다는 교회에 더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곧 교회 일이라고 여기는 게 일반적 현상이 아니었나 봅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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