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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아래서](42) “낮아짐이 높아짐이다”

[무화과나무 아래서](42)  “낮아짐이 높아짐이다”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낮아짐이 높아짐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올라갈 수 있는 한 높이 올라가라고 한다. 20대에 수십억을 벌고, 마흔도 되지 않아 100억 정도 굴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 우리는 환호한다. 고시를 여러 개 합격하고 IT 창업으로 남들은 학교 다닐 나이에 업계 정상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화제거리가 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나는 뭐하는 거지’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든다. 아직 대학교 1학년 정도거나 젊었다면, ‘나도 해보자’는 도전의식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취업준비생으로 몇 년 보냈거나, 한두 번 실패를 경험한 30대 이후라면 ‘인생 헛살았다’하는 마음이 더 많이 들것이다.

요즘은 어느 분야건 높아져야만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다르다. 아이러니하게 우리는 높은 곳 보다 밑바닥에 있을 때가 더 많다. 올라가려고 노력하지만, 성공보다는 실패가 익숙하고, 성공하면서 배우기보다는 실패하면서 배운다고 믿을 때가 많다.

그러나 밑바닥에서 시작한다고, 영원히 밑바닥 인생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자. 성경은 자기를 높이는 자를 낮추시고, 자신을 낮추는 자를 높인다고 하였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를 어디에서 낮출 것인가이다. 우리가 세상에 머리를 숙이면 비굴한 인생이 될지 몰라도, 주 앞에서 나를 낮춘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나의 밑바닥 인생을 드리면 그분이 높이신다. 그때가 밑바닥 인생을 사는 우리가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순간이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0-14).

누가복음 18장 이야기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으로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고, 한 사람은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세리다.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하는 것을 자랑하며 당당하게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큰소리로 기도한다. “주여 내가 이 일을 했나이다. 내가 이런 사람입니다.”그러나 옆에 있는 세리는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의 뜰에서 유대인 대접도 못 받고 숨은 듯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밑바닥 인생인 세리의 기도에만 응답하신다. 세상은 밑바닥 인생으로 낙인찍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의롭게 여기시고 의인이라 칭한다. ‘불의로 먹고 사는 죄인’이라는 사회적 낙인을 벗겨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과 다른 평가로 세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기적과 같이 그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왜 그럴까? 해답은 11절과 13절의 “서서”라는 단어에서 얻을 수 있다. 바리새인도 서있었고, 세리도 서있었다. 그런데 성경은 각각 다른 단어로 이들의 모습을 묘사한다. 능동태와 수동태다. 바리새인은 당당하게 서서 기도하지만, 그의 ‘서서’는 수동태로 표시되어 있다. 그는 자발적으로 기도하러 온 것이 아니다. 사회적 위치와 체면 때문에 떠밀려온 것이다. 그리고 와서 한 것은 자랑 밖에 없다. 그러나 세리는 달랐다. 능동형이다. 비록 이방인의 뜰에 서있고 밑바닥 인생이지만 자기발로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비천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눈도 들지 못하고 겸손히 기도하였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을 낮췄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자기 발로 주님을 찾아오기는 하지만, 눈을 치켜뜨고 따진다. “하나님! 이 정도는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밑바닥에 있는데, 밑바닥에서도 이렇게 노력하는데, 도와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믿음으로 주님 앞에 섰다면, 눈을 낮추라. 나의 교만한 눈을 내려놓으라. 언제까지 현실은 바닥인데, 눈만 높이며 살 것인가? 오래전 설교 준비하다가 인터넷에서 어떤 청년의 기도문을 발견한 적이 있다. 배우자를 위한 기도문이었다.

1) 체계적인 신앙 훈련을 받은 자매

2) 가난하게 살 수 있는 자매

3) 형제와 이웃들과 화목하게 살 수 있는 자매

4) 예술적인 재능이 있어서 악기 하나 정도는 다룰 줄 아는 자매

5) 멋을 아는, 그래서 자신을 꾸밀 줄 아는 자매

6)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자매

7)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자매

8) 신앙수준과 지적수준이 나와 비슷한 자매…

거기에 간단한 설명까지 있었다.

‘이 기도제목은 어느 날 갑자기 그 형제가 휘갈겨 쓴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고심하며 작성해온 내용이다. 어느 하나 뺄 수 없는, 그에게 가장 적합한 기도제목일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한 형제의 기도제목을 뭐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런데 자매가 걱정이었다. 이 기도제목에 합당하게 주문 제작될 자매를 생각해 보라. 가난하게 살 수 있는 자매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연단을 거쳐야 하는가! 돈이 없는 데도 멋을 내기 위해서 얼마나 창의적인 센스와 손재주를 갖춰야 하는가! 항상 삶을 개척해야 하는 고난을 감당하기 위해 얼마나 수고해야 하는가! 또, 하나님은 이 기도에 응답하기 위해서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멀쩡한 자매를 연단시켜야 하는가!

제발 나의 모든 것을 낮추라. 마음과 계획, 미래마저 주 앞에서 내려놓으라. 겸손하게 그 앞에 서라. 그러면 그분이 일하신다. 제발 조금 축복받았다고, 조금 은혜 받았다고 거들먹거리지 마라. 그런 거들먹거림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만약 밑바닥에 떨어져 있다면 더욱 낮추라. 더 낮추고 낮추라. 그것이 해답이다. 비록 지금은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느라 속상하고 자존심도 상하겠지만, 자신을 낮추는 당신을 통해 주님은 증명되고, 당신은 세상 속에서 빛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놀랍게도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끝까지 낮추겠다는 구절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야고보서 4장 10절처럼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라는 약속의 말씀만 있다. 그렇다, 영원히 밑바닥에 있는 인생은 주 앞에 없다. 자신을 낮추는 자를 주님은 그대로 두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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