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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스턴 칼럼-안지영] 목회 현장에서 만나는 현실 (1)

[미드웨스턴 칼럼-안지영]  목회 현장에서 만나는 현실 (1)

안지영 목사 (나눔교회 은퇴목사/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부교수)

[미드웨스턴 칼럼-안지영] 목회 현장에서 만나는 현실 (1)

우선, 우리 나눔교회를 두고 주변에서는 좀 독특한 교회라고 하는데,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어떤 분들은 나눔교회가 실행하고 있는 ‘온 세대 통합예배’가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특히 2세들을 위한 영어 예배인 EM(English Ministry)이 절대적이라고 믿고 있는 한인 이민 교회 환경에서 1세대와 2세대를 통합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가 지금까지 거의 20년간 지속되는 것을 보고 새삼 놀라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 교회는 세대를 통합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일반 교회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여러 다양한 시도를 해왔습니다. 그런 과감한 시도(어떻게 보면, 무모한 시도) 때문에 우리 교회가 일반 교회와는 다르게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리 특별난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특별나다는 것이 원래 ‘성경에서 제시하는 공동체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몸부림의 일환일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 본질을 현시대의 실정에 맞게 구현해 보려는 노력의 하나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본질 추구가 제대로 이뤄진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랍니다. 우리가 단지 바라는 것은, 교회의 방향성이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방향과 같다는 판단 아래 끝까지 가보려는 거지요. 그 길의 끝은 주님께 맡기고 말입니다. 그게 주님의 뜻이 아닐까 합니다.

교회에 관해 진지한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초대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를 고민해 봤을 겁니다. 물론 여러분 대부분은 초대교회에 관해 여러 설교를 통해, 강의를 통해, 혹은 책을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구호가 낯설지 않을 겁니다. ‘초대교회’라 함은 1세기부터 3세기 사이에 나타났던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걸 좀 더 좁혀서 본다면, 아마도 신약성경에 언급된 신약시대의 교회, 즉 1세기에 나타난 교회를 말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이런 구호가 나타난다는 것은 현시대의 교회가 처음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의 모습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부담을 가진 많은 목회자들이 모이면 터져 나오는 주제가 바로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인가? 어떤 목회여야 하는가?”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교회론에 입각한 교회를 추구하며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를 하지만, 정말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장애물을 만나 고군분투하는 얘기들이 수두룩합니다. 목회 과정에서 경험하는 자기의 한계, 교회 구성원의 문제, 재정이나 장소와 관련된 변수들이 이리저리 얽혀서 목회 현장을 복잡하게 만드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도 그 목회 현장을 떠날 수 없어서 견디고 있기는 하지만 목회자로 사는 삶이 앞뒤가 꽉 막혀서 체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내가 교회 개척을 시작하고 교단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집에 오는 우편물의 대부분이 ‘교회 성장’에 관한 세미나를 소개하는 인쇄물이었습니다.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프로그램과 세미나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으니까요. 미국 주류사회 교회들이 ‘교회 성장’이라는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그 인쇄물 더미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목회의 목적이 ‘교회 성장’에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교회 성장을 얘기할 때 ‘전도’를 강조하지 않는 교회가 어디 있을까요? 그렇지만 ‘영혼 구원’이라는 당위성 뒤에 교회의 ‘성장’이라는 숨겨져 있는 동기도 무시 못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교회 성장을 말하면서 ‘질적인 성장’을 언급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 걸까요? 실제로는, “오늘 몇 명이나 참석했는가, 헌금은 얼마나 들어왔는가?”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는 현실적 압박감이 그런 프로그램을 쫓아다니도록 만들어 버리는 게 현실이니까요.상 뚜껑을 열고 보니, 사람들은 누가 첫째냐 둘째냐는 그리 관심이 없더군요. 성경번역이 부족어로 번역되었다는 것에 감격할 뿐이었는데 말입니다.

선교사의 개인적인 욕망과 교단이나 교파의 욕망이 하나님의 선교를 교회나 교파의 선교, 선교사 개인의 선교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목회 현장에서도 그와 같은 고질병이 존재하고 있더군요. 하나님의 목회를 목사의 개인 목회 사역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목사의 교회로 전락시켜 버린 얘기를 직간접으로 듣게 되더군요. 그런데 나 자신도 그런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네요. 선교지에서는 겨우 버텼는데, 그나마 극복했다고 나름 대견스럽게 생각했는데, 목회 현장에서도 비슷한 유혹에 다시 바둥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교회의 양적 성장이 나의 주된 관심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주일 예배에 얼마나 참여했는지 신경이 쓰였지요. 주보를 받으면 지난 주일 헌금이 얼마였는지에 눈길이 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네요. 달라스 지역에 어느 교회가 분쟁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어느 교회로 그 교인들이 이동한다는 소문에 은근히 신경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한심하다는 자책을 하기도 했지요. 남의 불행이 나에게 행운이 되기를 바라는 이기심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그걸 넘어선다는 게 정말 쉽지 않더군요. 개척해서 지금까지 재정적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었기에 주일 사역을 마무리하고 귀가하는 길에 ‘이러다가 망하는 건 아닐까’라며 혼자 중얼거리기를 참 많이도 했던 것 같습니다.

교회가 응집력을 갖기 위해서는 교회 건물이 필요하다고 충고를 해주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충고가 사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기 건물이 있으면 그 건물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건물 구매를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재정 압박 때문에 건강한 목회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약 20년 동안 미국인 교회의 건물을 빌려 사용하고 있기에 교회 활동에 제약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자체 건물이 없기에 자연히 예배 시간이 오후 시간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 교회를 찾고 있는 이들에게는 부정적인 요소였던 것 같더군요. 또한 어떤 이들은 나중에 건축헌금에 대한 부담이 생길까 봐 자체 건물 없는 교회를 회피한다는 얘기도 돌아다니더라고요. 그래도 무리한 건물 구매를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시대의 흐름이 이렇다면, 당연히 우리 교회를 선택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게 뻔한데도, 주일에 새로운 방문자를 기대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았네요.

모든 세대가 함께 드리는 통합 예배는 아직도 일반 교인들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예배 방식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예배 중에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아이들의 울음소리, 웃음소리 등이 예배 집중에 방해 거리가 됩니다. 그러니 일반 교회에서 이런 소음 없는 예배에 익숙한 이들이 우리 교회 예배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수밖에요. 청소년부도 대예배에 모두 참석합니다. 그 말은 그들만의 예배가 따로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러니 청소년부 예배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나눔교회의 통합예배가 너무 낯설기만 할 겁니다. 내가 이런 예배를 고집하는 이유는 교회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시도를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예배의 취지를 아는 이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나 자신을 봅니다.

나눔교회의 조직과 시스템은 일반 교회에 비하면 매우 빈약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교회는 시스템이 빈약하다, 엉망이라고 비판하며, 결국에는 교회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의 시스템이 빈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름의 조직과 시스템으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물론 그때그때 새롭게 적용하는 것은 있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허술하게 보이는 시스템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은 나눔교회가 불편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방문자를 기대하고 있는 나 자신을 봅니다.

이런 여러 이유로 나는 처음 교회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러다가 교회가 망하겠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습니다. 예배 시간도, 예배 형식도, 교육 시스템도 모두 기존의 익숙한 방식이 아니기에 눈에 띄는 성장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각오하고 시작해서 지금까지 버텨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서는 재정적 압박감을 피하려는 유혹이 수시로 밀려오더군요. 이제 20년 가까이했으면 초월할 만도 한데, 여전히 그 유혹의 힘은 언제나 강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견뎌온 것만 해도 대견하다고 나 자신을 칭찬해 봅니다. “안 목사, 그동안 잘 견뎌냈다.” 언젠가 주님께서도 이렇게 평가해 주실 때가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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