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웨스턴 신학칼럼-류응렬 교수] Solus Christus, 오직 예수 그리스도
류응렬, 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설교학 교수
현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목사, 전 총신대학교 교수
1985년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한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Paul Knitter, No Other Name? 이란 책이다. 1987년 한국말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제목이 특이해서가 아니라, 물음표 때문이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 라는 말과,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이란 말은 생명과 죽음의 차이다. 오직 예수! 예수만이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이름이라는 의미다. 오직 예수? 예수 외에도 구원을 주는 다양한 이름이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 없는 구원과 십자가 없는 복음이다. 예수 없는 구원을 주장하는 것을 종교다원주의라 한다. 종교다원주의를 한 마디로 말하면, 너도 옳다, 그러나 나도 옳다 주의다. 예수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 구원이 있다는 말이다.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이 다양하듯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다양하기에 예수를 통하지 않고도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성경은 무엇이라 말할까? 베드로가 사도행전 설교에서 외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밖에 없다. 성경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보여준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약속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세기 3:15절). 후손이란 말은 복수처럼 들리지만, 히브리 원문을 보면, 한 사람으로 나온다. 그분이 구약에서 계속 말씀하는 메시아 예수다. 예수님도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절).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해석이나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끊어진 다리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 자신뿐이다, 다른 길은 없다고 말씀하신다.
많은 사람이 묻는다. 왜 꼭 예수라야만 하는가? 왜 굳이 다른 종교와 전쟁을 벌여야 하는가?
자기만 옳다는 배타적 자세라는 것이 21세기 과학시대에 나 홀로 진리라는 주장이 맞지 않는 사고 아닌가?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기 때문이다. 타락한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 사탄의 최고 전략은 우리 눈에서 예수를 가리는 것이다. 사탄의 공격은 모든 것이 좋아 보이지만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없애는 것이다. 예수를 보지 못하는 것은 문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전부가 무너지는 문제다.
예수 그리스도만 강조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세상에 아주 멋진 종교로 보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고, 서로 섬기고 돕는 세상만 강조하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 없는 구원 없다! 이 구호만 삭제해버리면 기독교인이 받아야 할 비난, 싸워야 할 가장 중요한 영적 전쟁은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오직 예수의 믿음을 포기하는 순간, 생명을 살리는 기독교의 복음은 고등한 윤리나 철학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이렇게 외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영광스러운 면류관이 아니다. 핍박과 고난이다. 베드로도 주님의 제자들도 이 복음 때문에 피를 흘렸다.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피로써 써 내려간 역사다. 마르틴 루터의 삶을 기억하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외친 루터. 이 외침 때문에 1521년 4월 17일 황제 앞에 불려 갔다. 황제 앞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기다렸지만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를 기다린 것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이었다.
루터보다 100년 일찍 종교개혁의 불씨를 일으킨 사람이 있다. 체코의 종교개혁가 요한 후스다. 프라하 구시가지 중심광장에 가면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서 있는 동상, 후스의 동상이다. 프라하대학에서 공부해서 1398년에 신학교 교수가 되었고, 37세 되던 1409년에는 프라하대학 총장이 되었다. 그가 전한 복음은 단순하다. 교회의 참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 교회의 법은 가톨릭의 법이 아니라 신약성경이다! 타락한 교황을 질타하고 교황의 무오성을 거부했던 후스는 결국 1414년 10월에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공의회에 참석한 후에 감옥에 들어간다. 교황 비판을 공개적으로 철회하고 용서를 구하면 목숨을 보장받는다는 회유에 조금도 굽히지 않고 진리를 외친 사람. 결국 1415년 7월 6일, 화형으로 세상을 떠난다.
세상 눈에는 참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다. 그렇게까지 예수만이 구원이라고 외칠 필요가 있었는가? 생명을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묻기도 한다. 누가 진짜 바보인지 한번 물어보라. 잠시 살아갈 인생에 예수 때문에 생명을 드리고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 바보인가? 적당하게 몇 년, 몇십 년 더 살다가 언젠가 세상을 떠날 날이 올 텐데, 불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바보 같은 인생인가?
오직 예수를 담대하게 외치지 못하는 시대. 너무나 간단한 이유 한 가지가 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확신이 없든지, 아니면 예수만 구원이라고 외침으로 오는 핍박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든지. 예수가 정말 유일한 주라 고백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은 두려움이 아니다.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죽어 있는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가슴마다 선교지요, 그리스도를 품은 사람마다 선교사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 7가지 묻고자 한다. 답이 예수 그리스도라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예수 그리스도! 라고 고백하기 바란다.
-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분이 누군가?
-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분이 누군가?
-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에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이름이 누군가?
- 겸손한 마음으로 간구하면 하늘의 문을 여시고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분이 누군가?
- 신자가 호흡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해야 할 그 이름이 누군가?
- 살아도 죽어도 우리가 그를 위해 살아야 할 유일한 주님이 누군가?
- 연약하고 부족하게 살았지만 세상 떠나는 날, 우리를 품 안에 앉아줄 분이 누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