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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스턴 신학칼럼-심민수 교수]

종교개혁 500주년, 물려받을 유산은 무엇인가

[미드웨스턴 신학칼럼-심민수 교수] </BR></BR> 종교개혁 500주년, 물려받을 유산은 무엇인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한 해가 기울고 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 논제의 반박문을 내건 이후 역사가 바뀌고 정치가 바뀌고 사회가 바뀌었다. 저항의 단초는 종교개혁을 넘어 혁명적 사태로 이어졌다. 한 주먹 눈덩이가 기울어진 역사의 산비탈을 굴러 내리며 엄청난 산사태로 이어진 격이다.

주류 종교개혁은 중세 교회의 역사를 접고 초기 기독교회의 끊어진 역사를 잇는, 상실됐던 교회 근원으로의 복귀인 듯했다. 유럽을 지배하던 보편적 종교권력의 억압에서 해방되어 교회 본연의 생명력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았다. 세속적 속성과는 무관한 본래적 교회의 진정성이 다시 발아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여는 듯이 보였다.

그런 전망과는 별개로 종교개혁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무관할 수 없었다. 중세는 하나의 보편적 종교권력이 세속권력까지 지배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한 사회 전체를 끌어가던 지배 권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를 맞이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그 권력을 대체할 새로운 권력의 출현 혹은 기존의 여타 권력의 대두를 필요로 했다. 독일 남부지역에서는 그 권력이 봉건 영주들과 협력한 루터의 개혁 그룹으로 넘어갔고 스위스에서는 시민대표라는 관료들과 뭉친 츠빙글리, 그리고 칼빈의 개혁 그룹으로 넘어갔다.

주류 종교개혁그룹이 정치적 힘을 얻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무대 위에서 정치권력의 조직적 세력화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동시에 지녀서는 안 될 비본질적인 요소를 함유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종교와 정치의 관련성은 단순하지 않고 매우 미묘한 사안이다. 그러기에 그 관계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일은 단적으로 말할 수 없는 상당히 복잡한 작업이다. 다만, 역사의 교훈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종교가 정치권력의 중심에 있을 때 그 종교는 본질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주류 종교개혁그룹의 정치세력화는 교회 조직 자체가 정치권력형의 조직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교회의 생명력이 조직의 힘이나 권력체제의 논리로 변질될 수 있음을 가리킨다. 본디, 교회의 존립은 그 자체의 생명력에 의존해야 한다. 정치권력조직의 속성인 강제성과 종속성이 작동 요소가 되는 순간, 교회는 본질의 괘도에서 이탈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주류 종교개혁은 초기 기독교회의 역사를 잇기에는 시작부터 한계성을 담보하고 있었다.

주류 종교개혁자들의 불굴의 노력이 사회개혁에까지 새로운 역사 지평을 열었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종교적으로도 교회의 내적 문제인 기독교 기본 진리의 복구와 회복에 기여하였다는 점은 기독교 역사에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개혁의 불완전성은 그 이후 현대 교회에까지 부정적 유산을 물려주었다. 교회와 정치권력과의 친밀한 관계가 그렇고, 교회 내 조직의 정치적 성향이 그러하다. 당시, 주류 개혁 교회는 가톨릭의 정교일치의 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 고질적인 문제인 성직주의를 온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이러한 주류 종교개혁자들의 부정적 유산은 지금까지 주류 개신교 지도자들로 하여금 정치권력과의 지근거리를 선호하게 하였고 교회 내 성직자와 평신도의 분리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로써, 성경의 직분 개념이 세상 정치 조직으로부터 배워 익숙해진 직위와 계급 양상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이제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사회에서도 군림할 수 있는 지위를 얻는 것이다. 교회의 한 자리는 세상의 한 자리와 별반 다름이 없게 된 것이다. 세상 임금을 삼으려던 백성들을 뿌리치고 초라한 모습의 새끼 나귀를 타고 가시던 예수님을 잊은 것이다.

또 한편, 정치권력과 가까워진 교회는 교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자들이 접근하기에 더욱 용이해졌다. 교회 직분은 얻기 쉬운 직위가 되었고 그 직권을 남용하여 교회를 버젓이 정치 활동의 도구로 삼으려는 자들에게 열린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성경적 원리와는 상반된 정상배들의 이런 행태로 인해 교회가 얻은 것은 결국, 불명예뿐이다. 교회를 악용하는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 줄곧 일어나는 일이다. 요셉은 하나님을 이용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었기에, 때가 되자 시대의 인물로 쓰임 받았다. 그러나 옳지 못한 동기는 언제나 이 순서를 뒤집어 놓는다.

교회가 세상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길은 세속적 권력의 길과는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 세속을 넘어설 수 있는 기독교의 강력한 무기는 도덕성에서 비롯된다. 신앙 공동체가 지닌 높은 수준의 도덕적 자질과 인격적 품위가 세상에 선한 지표와 모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세속과는 구별된 교회의 도덕성이야말로 시공을 넘어 역사 속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귀한 영향력을 남길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정치세력의 권력보다도 강력한 것이다. 자연의 힘이 인위적 힘을 능가하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발출된 생명력은 세상의 어떤 인간적 권력보다도 우위에 있다.

반복컨대, 교회의 생명력은 세상에서 도덕적인 형태로 드러나야 한다. 바로, 그 생명의 힘이 세상을 진정으로 변혁시킬 수 있는 근원적인 원리이다. 아돌프 하르낙(1851~1930)은 “초기 3세기 동안 기독교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공동체적 삶의 도덕성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초대교회 생존의 힘은 도덕성에 기초했다는 것을 되풀이해 주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공동체의 도덕성이란 하나님의 생명력으로부터 발현하는 본성이라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교회가 기필코 물려받아야 할 진정한 유산이다.

수많은 행사들로 가득했던 종교개혁 500주년의 한 해가 저물고 있다. 그 행사들 가운데서 우리가 지녀야 할 기독교의 도덕성은 과연 얼마나 회복되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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