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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광 목사의 문학의 숲에서 만나는 진리의 오솔길]

김성한의 ‘바비도’

[강태광 목사의 문학의 숲에서 만나는 진리의 오솔길] </br></br> 김성한의 ‘바비도’

 

 

작품의 줄거리

때는 중세 가톨릭이 영국을 지배했던 15세기 초엽이었다. 헨리 4세가 왕위를 지키는 이 시기 영국은 종교적 통합을 꾀했던 시기다. 당시 천주교는 심각하게 타락한 상태였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화채설을 강하게 주장하며 성찬식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가 진짜 예수님의 살이요 예수님의 피라고 가르치며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단으로 정죄한다. 교구를 책임지는 주교들은 회개를 통한 용서가 아닌 뇌물을 받고 사죄를 선포하는 악을 행했다. 나아가 그들은 라틴어 성경만이 유일한 성경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영어 성경을 읽는 것을 이단적 행위로 금했다. 영어 성경을 읽다가 적발되면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화형에 처해지는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재봉 직공 바비도는 영어성경읽기회에 참가하면서 성경을 읽고 진리를 깨닫게 되면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 바비도는 교회의 사제들의 거짓과 위선에 분노한다. 사제들은 성경의 해석을 독점하고, 평범한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었다고 무리한 주장을 하고, 온갖 죄를 자행하면서도 자신들의 삶과 언어를 거룩으로 포장하는 모습이 역겨웠다.

자신들의 권위가 훼손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교회 지도층(성직자들)은 민중들을 의식화하는 영어성경읽기회를 이단(異端)으로 규정한다. 지금이야 성경 읽는 것을 권장하지만 15세기 영국의 가톨릭 교회는 라틴어 성경이 아닌 영어성경을 읽는 것을 이단적 행위로 정죄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직자들의 지도를 받지 않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을 순회 종교재판소에서 화형시키고 있었다. 순회 재판소는 교구마다 돌아다니면서 차례차례로 이단을 숙청했다.

바비도는 온 세상의 타락을 보게 된다. 천주교 지도자만 타락한 것이 아니다. 성경만이 진리요, 그 밖에 모든 것은 성직자들의 허구라고 열변을 토하던 ‘성경읽기회’ 지도자들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것이었다. 재판정에서 성경읽기회 지도자들이 너무 비겁했다. 그들은 재판정에서 너무 쉽게 자신들의 신념을 포기한다. 그들은 쉽게 영어성경을 읽는 것이 잘못이요,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틀림없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고 시인하고 눈물로써 회개하고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리고 자신처럼 신실하게 영어성경을 읽고 복음을 받아들였던 성경읽기회 평신도 회원들이 너무 쉽게 변절하는 것을 보면서 바비도는 충격을 받는다. 자기와 나란히 앉아서 영어성경을 읽고 말씀의 진리들을 목숨으로써 지키겠다고 맹세했던 동료들이 화형의 위기 앞에서 신앙고백을 포기하고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맹세를 깨뜨리고 변절하는 것이었다. 온 영국을 휩쓸고 있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구차한 생명들이 풀잎같이 떨고 있다. 권력을 쥔 자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양심과 양식이 마비되고, 힘없는 백성들은 생명의 보전이라는 본능에 너무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이었다.

바비도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그는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해서 라틴어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영어성경을 읽는 것이 극악무도한 일로 치부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용납할 수 없었다. 진리를 독점하려는 교회 세력들에게서 거대한 위선(僞善)을 보았고, 급기야 교회 조직과 자신의 차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힘의 있고 없음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드디어 바비도가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정에서, 재판을 주관하던 주교는 바비도에게 겉으로는 온유한 체하며 죄과를 인정하고 뉘우칠 것을 설득한다. 바비도는 이런 감언이설에 넘어갈 수가 없었다. 심문 과정에서 바비도의 바른 신앙과 신앙적 용기가 드러난다. 주교는 영어성경을 읽은 것을 마귀의 장난으로 규정한다. 바비도는 이런 주교의 태도와 질문에 강하게 반발하며 ‘왜 성경을 쉬운 우리말로 읽는 것을 악하게 평가하냐?’고 반문한다. ‘교회가 금하는 것이니 나쁘다’라고 대답하는 주교에게 바비도는 ‘교회가 하는 일은 다 옳으냐?’라고 반문한다. 주교(사교)는 교회의 명령은 무조건 옳다고 말하면서 전형적인 로마 교황청의 논리를 편다. 그것은 ‘교회의 명령은 교황의 명령이요, 교황의 명령은 성 베드로의 명령이요, 성 베드로의 명령은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바비도는 지금 이런 상황이 그리스도의 뜻이라는 그들의 논리에 도무지 공감하지 못한다. 바비도는 이 더러운 세상에서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며 스스로 ‘인간 폐업’을 선언한다.

스미스필드 형장에는 바비도의 분형(焚刑)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약하고 몽매한 민중들은 세상에 대한 그들의 원망과 증오를 바비도에게 모조리 퍼붓는다. 그들은 바비도에게 발길질을 하고 침을 뱉으며 욕설을 한다. 무지몽매하고 악한 군중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헨리 4세의 아들 태자 헨리가 나타나 바비도에게 말을 건넨다. 그는 바비도를 구해 주겠다며 죽기 전에 죄를 씻을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바비도는 ‘지옥에서 먼저 기다리겠노라’라고 빈정댄다. 사형대에 올라 불을 지피는 순간, 태자는 돌연 불을 끄고 바비도를 내리라고 명령한다. 바비도의 용기와 신념에 감동한 태자 헨리가 바비도를 무조건 살려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바비도는 태자의 동정(同情)을 뿌리치고 당당히 분형(焚刑)을 맞는다. 바비도의 당당한 죽음은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소설가 김성한과 바비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본 도쿄대학교 영문과를 거쳐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당대 신지식인 작가였다. 1950년 서울신문에 단편 〈무명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한 후 영국 역사, 그리스 신화 등 동서고금의 사회상을 무대로 삼아 종래의 서정적, 토속적인 소재 공간을 벗어났으며 특유의 지적이고 간단명료한 소설 기법을 선보여 한국 소설의 체질적 현대화에 기여했다. 철저한 역사적 고증 작업을 거친 간결한 문체의 작품들은 한국 역사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점에서 본 ‘바비도’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소설 바비도의 메시지

이 작품은 바비도를 지나치게 선하게 묘사하면서 주변인들의 실존적 고민을 너무 단순화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진리에 대한 그리고 죽음으로 양심을 지키는 바비도의 용기를 섬세하게 묘사한 좋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많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우선 당시 타락한 영국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날 교회의 문제를 고발한다. 우리는 중세 가톨릭은 쉽게 비판하면서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현대 교회의 약함에 눈을 감는다.

김성한은 영국에 실존 인물 바비도를 통해서 격동기 조국의 지식인들의 용기 없는 모습을 고발한다. 아울러 15세기 영국 사회처럼 사회적 죄와 구조적 악에 불평하지만 실제적 위협 앞에서 너무 무기력한 사회를 고발한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 이 시대의 지식인들은 진정한 용기를 가졌는가? 그토록 증오했던 군사정권을 슬그머니 닮아버렸던 문민정부나 타도를 외쳤던 악과 죄를 반복하는 시대의 모순을 김성한과 바비도는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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