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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스턴 신학칼럼-이장렬 교수]

“나를 따르라”: 주권적 보존과 제자도의 책임

[미드웨스턴 신학칼럼-이장렬 교수] </br></br> “나를 따르라”: 주권적 보존과 제자도의 책임

 

 

마지막 회

 

“나를 따르라”: 주권적 보존과 제자도의 책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8-19)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가 훗날 십자가에 처형될 것이고 그러한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그런 일이 어쩌면 있을 수 있겠다고 추측하시는 게 아니다. 베드로의 죽음에 대한 예언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21:18)라는 반복 강조 어구로 시작하시면서 앞으로 베드로에게 벌어질 일의 확실성을 담보하신다.

그런데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을 대면한 베드로에겐 이 말씀이 어떻게 들렸을까? 만일 누군가 내게 와서 30여 년 후에 이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만일 다른 사람이 아닌 주님께서 직접 그런 말씀을 내게 하신다면 어떤 느낌일까? 꺼림칙한 느낌일까? 압도적인 부담감이 앞설까? 주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질까? ‘아이, 설마 그런 뜻은 아니시겠지…….’ 하면서 어떻게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 들까?

그러나 저주의 선언처럼 들리는 주님의 예언이 베드로에게는 격려의 말씀으로 다가온다. 얼마 전 목숨 부지를 위해 스승과의 관계를 거침없이 부인하고 거듭 또 거듭 부인했던 베드로에겐 자신의 십자가 처형 예언이 위로 그 자체다. 처절히 실패했던 제자 베드로에겐 자신의 처참한 최후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샬롬(shalom) 그 자체다. 왜냐면 이 예언의 말씀을 통해 변절자 베드로가 충성된 제자로 끝까지 보존될 것이라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베드로를 변절자가 아닌 주님의 사도, 교회의 목자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로 기억한다!) 물론 앞으로도 베드로는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로 남을 것이다(갈라디아서 2:11-14). 하지만 주님께서 그 가운데 베드로를 붙잡아 주실 것이고, 그가 배신자가 아닌 충성스러운 제자로서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도록 보호해 주실 것이다. 베드로가 순교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궁극적 예배를 올려드릴 수 있도록 주께서 친히 도와주실 것이다. 그렇기에 십자가에 처형될 것이라는 저주 충만한 것 같은 선언이 베드로에겐 (적어도 베드로에겐) 축복 가득한 선포다.

일찍이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장담한 적이 있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 13:37)

하지만 그 결과는 실로 참담했다. 주님을 위해 생명을 던지겠다는 베드로의 호언장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생존을 위한 세 번의 반복된 부인으로 이어진다(요 18: 15-18, 25-27; 13:18 참조). 그러나 이제는 배신자 베드로가 충성스러운 제자로 끝까지 보존될 것이라 약속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반복 강조의 표현을 통해 베드로를 지켜주실 것을 확실히 담보하신다. 그렇기에 로마의 십자가에 무참히 처형될 것이란 주의 말씀이 베드로에겐 도리어 복된 소식이다. 자신의 목숨 부지를 위해 주님을 배신했던 베드로에게는 주님을 따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에 대한 궁극적 사랑을 표현할 기회다. 장차 순교를 통해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그의 거듭된 고백이 공허한 것이 아님을 확증할 것이다(21:15-17 참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변절자 베드로가 충성스러운 제자로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도록 끝까지 그를 지켜 주실 것이지만, 그렇다고 베드로가 앞으로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저 그가 스스로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도 된다는 뜻도 아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매일의 삶 가운데 주님을 충성 되게 좇아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 [베드로의 최후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9)

 

베드로는 여생 동안 매 순간 주님을 따라야 한다. 다가올 30년 이상을 그렇게 날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좇아가야 한다.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본받아 로마의 십자가에 달려 순교할 그때까지 하루하루 주님만 좇아야 한다(21:22 참조). 과거엔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삶이었다. 또 장래에는 십자가에서 충성스러운 주의 제자로 순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요 21:18-19). 하지만 지금 베드로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순간순간 주님을 좇는 일이다(요 21:19).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나를 따르라(헬라어: 아콜루떼이 모이) (요 21:19)”는 예수님의 명령에서 “따르라”는 헬라어로 아콜루떼이다. 이 명령형 동사는 현재시제인데, 헬라어의 현재시제 동사는 많은 경우 현재 진행의 뜻을 담고 있고, 이 경우도 역시 그렇다. 다시 말하면, “나를 따르라”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단회적으로 결단하고 실천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매일 순간마다 따라야 할 명령이다. 어제의 제자도가 오늘의 제자도를 대신하지 않는다. 오늘의 충성이 내일의 충성을 대체하지 않는다. 순간순간마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제자된 삶이다. 유진 피터슨이 말한 대로 “제자도”란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이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은 또한 지극히 인격적인 성격을 내포한다. 주님의 명령은 따라야 할 대상이 한 특정 인격체임을 분명히 한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어떤 교훈 모음 혹은 특정 기관을 따르라 하지 않으셨다. “나” 즉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을 좇으라 명하셨다. 제자도란 본질적으로 예수님을 좇는 일이다. 성령을 통해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다(갈 2:20; 행 16:5-6 참조). 그 가운데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이어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제자도는 지극히 인격적인(personal) 행위다.

요한복음 21:19의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은 베드로의 제자 소명을 재활 복구시켜주는 회복의 말씀이다. 십자가에 달려 처형될 그때까지라도 예수 좇는 소명 말이다(요 21:18-19 참조).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그 소명 말이다(빌 2:6-8; 막 10:45 참조). 고난을 감내하고 순교와 핍박을 전제하며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 묵묵히 그리고 끈기 있게 따라가는 그 소명 말이다(막 8:27-10:45 및 공관복음 병행구들, 특히 눅9:23 참조). 매일의 삶 가운데 자신이 하고픈 일들 혹은 자신이 원한다면 선택하여 할 수 있는 일보다 주님 그분을 더 사랑하는 그 고귀한 소명 말이다(요 21:15; 막 12:29-30). 그 가운데 새 출애굽(New Exodus)의 역사에 동참하는 그 영광스러운 소명 말이다(막 1:2-3; 8:27-10:45 참조).

부활하신 주님은 디베랴 바닷가로 처절히 실패한 제자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를 재활 복구시킨다. 변절자 베드로가 이제 충성스러운 제자로 끝까지 보존될 것을 담보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베드로가 순간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초점을 두고 그분을 긴밀하게 그리고 친밀하게 좇아야 함을 명하신다.

이렇게 디베랴 바닷가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다시 한번 신비롭게 하나가 되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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