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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요셉 목사의 ‘갈등을 이기는 삶’ 시리즈]

회의(會議)에서 오는 갈등 해결하기

[장요셉 목사의 ‘갈등을 이기는 삶’ 시리즈] </br></br> 회의(會議)에서 오는 갈등 해결하기

 

 

‘갈등을 이기는 삶’ 시리즈 (31)

 

교회만큼 회의가 많은 단체도 없을 것입니다. 사무처리회, 제직회, 각종 전도회, 청년회, 학생회, 구역회 그리고 각 위원회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회의가 많습니다. 그 회의에는 거의 목회자가 회의를 주재하거나 관여하여야 합니다. 어떤 회의는 유쾌하고 즐겁게 진행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회의에서 갈등이 심화하여 언쟁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몸과 마음이 피로해지는 때가 다반사입니다.

필자가 교회에 부임할 당시, 이 교회는 설립된 지 이미 20년이 된 교회인지라, 기성 교회에 있을 만한 부서들은 모두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서별로 한 달에 한 차례 월례회를 가지는 것이 교회 전체로 볼 때, 여간 시간 낭비가 아니었고, 구조면에서 비효율적인 면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회의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것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하여 전혀 해결책을 갖지 못한 채 힘든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선교회 월례회로 모였다 하면 서로들 언성을 높이고 다투다가 결국은 회의를 끝맺지도 못한 상태에서 문을 박차고 나가는 사례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남선교회도 별반 다를 바 없이 임원들끼리 하나 되지 못한 채 서로 반목하므로 교회를 위해 건설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결국, 부임한 지 꼭 일 년이 지난 때에 필자는 제직회에 남여선교회를 비롯하여 모든 위원회 폐지안을 내놓았습니다. 그 안을 내놓기 전에, 남여선교회의 존재 목적과 교회 내에서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고, 현재의 선교회를 그대로 진행해 보아야 크게 달라질 것이 없음을 그들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여선교회를 폐지하는 대안으로 소그룹 모임인 ‘목장’에 소속하여 전신자가 사역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어느 회의든지 무조건 시비를 일으키는 회원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회원은 회의 진행을 위하거나 교회 발전을 위한다기보다, 시비를 위한 시비를 하므로 목회자의 갈등을 부채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회의가 없는 주일이 제일 좋은 날이라고 합니다. 주일예배를 마친 다음 회의를 주관하거나 참관하고 나면, 괜스레 우울한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목회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라도 회원들 사이에 의견이 어긋나서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불안해지는 것이 목회자의 심정입니다. 인근에서 목회하는 어느 타 교단 목회자는 당회나 제직회를 소집하고 참석하려면, 저절로 긴장이 되면서 회의장에 들어서기도 전에 머리부터 띵해 온다고 실토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점은 개교회의 회의만 아니라, 목회자들이 모이는 지방회나 총회 등 그 밖의 회의에서도 신경질적인 회원은 어김없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이는 시비를 걸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이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발언하려고 손을 들면, ‘또 시작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앞섭니다. 논리가 정연한 것도 아니고, 사리에 맞는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요, 진리를 설명하는 것도 아니면서, 자기선전이 아니면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떠들기 때문에,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럴 때 그 회의의 사회자이거나 그 사건과 관계가 있는 목회자에게는 갈등이 심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 한번 나서서 한바탕 말을 쏟아부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목회자로서는 실패입니다. 남에게 비겁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싫어서 큰소리치며 무모한 짓을 감행하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는 없지 않습니다. 남의 눈에 용감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충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蠻勇)입니다. 베드로가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내리쳤다고 일이 잘 되었던가요? 칼을 들고 내리치는 베드로보다는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는 예수님의 행동이 돋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용기는 겸손의 바탕 없이 피어날 수 없는 향기로운 꽃입니다. 영어에도 멋진 패배(to be graceful in defeat)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이 있어 이기는 용기보다는 의젓하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용기가 더욱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패배도 떳떳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흥분이나 감정적 폭발은 만용에 불과한 것으로 회의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을 목회자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해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던 한 유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의 용기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향기롭고 가장 진실한 용기였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았고, 훌륭한 지위를 얻었으며, 은혜롭게 설교를 하더라도 문제는 인간성인데 목회자는 어떤 사람이라도 용납할 수 있는 포용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혜와 인내가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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