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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간증] 한반도 복음통일의 계절이 긴박히 왔다 (3)

김요셉 목사 (가명)

북한 복음화를 위하는 사명자 (미주)


한반도 복음통일의 계절이 긴박히 왔다 

3. 북한(중국 동북 3성 포함) 사역에 관한 고찰 

‘복음을 향한 문이 굳게 닫힌 북한에 어떻게 하면 복음의 씨를 뿌릴 수 있을까?’라는 것이 그동안의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내가 발견한 첫 번째 해답은 조선족이었다. 중국은 문화 혁명 후 지하에 숨어있던 교인들이 정부 감시를 피해 가정에서 모이기 시작했는데 중국 길림성 연변은 조선족이 중심이었다. 두만강 중국 국경, 연길과 훈춘이 조선족들의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와 중국 공산혁명을 겪으면서도 소수민족으로 대륙에서 살아남은 한국계 중국인들이다. 한국말을 쓰고 한국 문화를 어느 정도 공유하지만, 중국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으면서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어려운 상황 가운데 복음을 믿고 주님을 영접한 조선족들은 공산당의 압력과 핍박에도 신앙을 지켜온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나는 그동안의 사역을 통해 ‘이들이 처한 문화적, 환경적 특수성이 복음의 문이 봉쇄된 북한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라고, 즉 북한 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이라고 믿게 됐다. 이 믿음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으로 선교를 왔던 캐나다 출신 선교사 말콤 팬윅은 원산에서 교회를 개척한 뒤 여기서 양성한 젊은 사역자들을 만주와 연해주로 보냈다. 이처럼 알게 모르게 그동안 조금씩 복음의 씨앗이 조선족들에게 뿌려지고 있었고 나는 그런 결실이 맺히는 모습을 미국에서도 종종 보았다. 

연변 출신인 달라스한인제일침례교회의 김덕희 전도사님이 조선족들을 위한 교회 건축에 지속적으로 헌금을 보낸다는 이야기, 미국으로 이민 온 조선족들이 중국에 가족을 두고 온 다른 탈북민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며 애를 쓰는 이야기 등이다. 내가 아는 목사님 한 분도 오랜 세월 이산가족으로 지내다가 이분들의 도움으로 중국에서 어머니를 모셔 올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사례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북한과 직접 연결할 수 있는 조선족 지하 교인을 만나려고 노력했고, 하나님은 길림성 연변 신풍가에 김동준 집사를 알게 해주셨다. 이 분을 만나기 위해 출국 준비를 했다. 텍사스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홍콩으로, 홍콩에서 다시 북경행 비행기를 탔고, 연변까지 30시간이나 추운 엄동설한에 기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지만, 여기에 들인 수고와 비용,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김동준 집사와의 만남을 통해 1989년 중국 침례신학교가 연변에 설립됐기 때문이다. 1989년 겨울 중국 공안(경찰)의 감시를 피해 지하에서 30명이 모였고 18과목, 75학점의 교과과정으로 2년제 신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가 설립됐다. 

미국 얼바인한인침례교회 임철빈 담임목사가 초대 학장으로 수고해 주셨고 터스틴침례교회의 이기설 담임목사가 학감으로 자원해 신학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분들의 크나큰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감히 자비량 사역을 시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분들뿐 아니라 강사진을 맡았던 미국의 텍사스 싸우스웨스턴침례신학교, 나의 선교학 과목을 수강한 교포 신학생, 한인교회 이민교회 목회자들은 모두 자비로 조선족 신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을 수없이 왕래했고 재미 한인들은 학교 건물을 세우기 위해 헌금을 보내줬다. 

많은 이들의 귀중한 협동적 헌신이 모인 결과 현재까지 400명이 넘는 조선족 신학생들을 배출했다. 훗날 북한 선교에 누구보다 귀하게 쓰일 이들은 현재 북한이 복음의 문을 개방하기를 기다리며 중국의 3성(흑룡강성, 길림성, 요령성) 이외 열방 곳곳에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들을 사용하셔서 중국에서 그들의 조부와 부모님의 고향 땅 북한을 포함한 전 조선 반도 복음화를 위하는 일꾼으로 우리와 함께 협동하도록 사명을 주시며 인도하여 주시고 계신다. 중국어에 능통한 조선족 졸업생들은 다시 한족을 가르칠 수 있는 신학교를 개설했다. 중국 공안의 살벌한 감시를 피해야 하기에 마음 놓고 가르칠 수는 없지만, 그런데도 벌써 천 명이 넘는 사역자들을 우리가 양성한 졸업생들이 한족 신학생들에게 유창한 중국어로 열심히 가르쳤고, 훌륭한 한족 사역자들을 배출했다. 

북한보다는 덜 위험하나 여전히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중국에서 하나님은 조선족을 통해, 또 한족을 통해 북한 땅을 복음화할 신실한 조선족과 한족 사명자들을 강력한 그리스도의 군사로 예비하고 계신다. 이와 같은 결과는 나의 동역자 이기설 목사님의 놀라운 헌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기회를 통해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나는 지난 34여 년간 중국과 북한을 자원해서 왕래한 횟수가 80여 차례가 넘는다. 오로지 주님이 주신 북한의 복음화 사명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여러 미국인 사역자들과 함께 내가 남긴 작은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북한은 김일성 3대 세습을 공고화하여 복음이 들어올 수 없게 문을 막았다. 기독교를 완전히 적대시할 뿐 아니라 최고 존엄 정권 유지를 위해 외부에서 들어오는 어떠한 종교도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 나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북한에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복음을 전달할 수 없다면 복음의 마음을 담아 중국 길림성에서 법적으로 공인된 무역회사를 만들어 정식으로 무역과 교역의 루트를 통하여 구호물자를 보내자’는 것이 내가 찾은 방법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음식, 의류, 의약품, 비료 농기구, 디젤 등과 같이 북한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들을 중국에서 중국무역회사를 통하여 기차로, 화물트럭으로 보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미남침례교단과 Texas YWAM Leland Paris 총재님의 지원, 재미 한인 이민교회의 지원에 감사하며 특별히 구호물자를 선박으로 수송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북가주 고 이동호 회장님께 감사를 전한다. 오직 사명과 믿음으로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소속된 재단도 없이 어떤 백그라운드도 없이, 그저 사명을 따라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무명인으로 중국에서 물자들을 구입해 섬겼다. 

비영리 자원봉사 차원에서 개인이 구호물자를 보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길이다. 나의 상식과 언어 소통이 불편한 중국 직원들과 억척같은 북한 당 간부들을 상대하며 어떻게든 구호물자를 보내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초인간적인 믿음, 인내와 관용 없이는 불가능했다. 상상할 수도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멸시와 학대, 착취와 배반으로 고통당하는 트라우마도 있었고, 때로는 피눈물이 날 만큼 억울한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도 나의 노력과 희생이 영적인 사랑의 표현으로 조금이나마 영양실조에서 허기진 북한 인민에게 전달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 일을 계속했다. 

어렵게 마련한 구호품이 현지 주민들에게 직접 전달되기를 희망했지만, 북한 중앙당에서는 “배급체제를 통해 수령님의 이름으로 하달해야 한다”라고 통보했다. 수용하기 힘든 제안이었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스도의 조건 없는 아름다운 사랑과 은혜를 전달하는 마음으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그들에게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내는 지원 물자가 북한 주민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조건 없이 보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이유를 떠나 당장 죽도 못 먹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 북한 주민들의 참상이 너무나 처량했고 불쌍했다. 그리고 영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부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자 북한 땅에 복음을 전할 전도의 전략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노력의 응답으로 나는 비공식적으로 지원 물자를 공급한다는 조건으로 당의 허락을 받고 공식적으로 지방당 차원에서 북한 입국이 가능하게 됐다. 조금씩 나에 대한 북한 측의 대우가 좋아졌고 마침내 북한에 머물 수 있는 거주증까지 우리 미국 팀에게 발급해 주었다. 이 모든 것들은 철통같이 닫힌 북한의 국경을 왕래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됐다. 

모두 내가 바울 사도가 유대인으로 로마 시민권의 혜택을 받은 것처럼 미국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도 바울이 위기의 순간마다 로마 시민의 특권과 보호를 받으며 전도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나도 미국 여권의 도움으로 북한 선교를 더 수월히 진행할 수 있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다’라고 생각했던 그간의 노력과 헌신이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북한 주민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 주는 대가로 나는 북한을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는 통행권을 얻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덕분에 중국 길림성에서의 신학 교육과 복음 사역, 그리고 강 건너편 북한에서의 구호품 지원을 통한 북한의 복음화라는 큰 틀을 구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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