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수다(5) – 그런데 오늘은 누가 죽었어요?
김영하 목사(샬롬선교교회, 미주)
그런데 오늘은 누가 죽었어요?
한국에서의 목회는 경조사만 기억하고 심방만 잘해도 반은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조사를 챙길 일이 많았다. 어느 날은 아침에 백일잔치 설교를 하고 오후의 장례식에 가기 위해 차에서 양복을 갈아입을 때도 있었다.
본인이 섬기는 교회뿐 아니라 어려운 개척교회와 목회자들을 두루 살피며 도움을 주었던 어느 집사님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몇몇 목사님과 함께 조의를 표하러 갔다. 조금 뒤에 어느 전도사님이 후다닥 들어오더니 갑자기 이렇게 가시면 어떻게 하냐고 가슴을 치며 큰소리로 한참을 우셨다. 그의 울음에 장례식장은 숙연해지고 우리는 그 전도사님이 고인의 도움을 많이 받으셔서 저렇게 마음이 아프신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장례식장이 떠나갈 듯이 애통하던 그가 울음을 그치고 우리가 모여 있는 곳으로 와서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누가 죽었어요?” 그 말에 빵 터진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웃을 수도 없기에 웃음을 참느라고 혼났다. 그 전도사님은 돌아가신 집사님이 다니는 제법 규모가 큰 교회의 경조부를 담당하시는 나이가 지긋한 분이셨는데 누가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단지 교회 사무실의 연락을 받고 와서 그렇게 우신 것이다.
경조부장이 누가 돌아가셨는지도 모르면서 왔느냐? 상주가 그 사실을 알면 어떻겠느냐? 어쩌면 그렇게 큰 소리로 울 수 있느냐? 남들이 듣지 못하게 소곤소곤 물었다. 그는 장례식장에서는 큰 소리로 울어 주고 잔치에 가서는 신나게 놀아주며 음식을 먹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며 자신이 가면 그곳에 맞게 처신하기에 분위기가 달라진다고 했다.
야곱이 죽었을 때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다(창 50:3). 회당장 야이로의 열두 살 먹은 외동딸이 죽었을 때도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였다(눅 8:52). 슬픈 일을 당한 자에게 마음을 다해 위로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일부러 울어주는 것은 꼭 해야만 하는 것일까? 오늘날 교회에서 복음의 진정성이 없이 그저 즐거움을 위한 일회성 행사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