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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牧會斷想] 육아의 첫날밤

[목회단상 牧會斷想]  육아의 첫날밤

지준호 목사(헌츠빌 은퇴, 자유기고가)

육아의 첫날밤

4살 5살 된 두 딸을 두고 떠나는 아들 며느리와 육아를 해야 할 우리 부부가 한 마음으로 걱정을 한다. 헤어지지 않으려 울면 어떻게 하나? 뿌리치고 이별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마음이 아리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가슴 졸임이 기우임을 알았다. 아쉽고 안쓰럽고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엄마 아빠는 “빠이”를 하는데 두 손녀는 건성으로 “빠이”를 한다. 그리고 깔깔거리며 문어 인형을 가지고 행복한 놀이를 즐긴다. 가지 말라며 울며 불면 사랑을 보다 짙게 느낄 수 있을 텐데. 서운함과 아쉬움으로 어정쩡하게 떠난 엄마 아빠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몇 달을 며칠로 착각한 것일까? 놀이에 빠져서 일까? 부모의 은혜를 아는 것은 기대도 않지만 그동안 들은 정은 분명히 있을 터인데. 아리송해하며 안도를 느낄 때 ‘밤이 되면 엄마를 찾겠지?’ 염려가 다시 마음을 사로잡는다.

네 식구만 남아 더 넓어진 듯한 공간에서 아내와 함께 엄마 생각나지 않도록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OK로 응답을 한다. 스포일 시키면 안 된다는 굳은 신념은 어디로 갔는지! 충성된 종처럼 시중들며 식사까지 마쳤다. 목욕시켜 일찍 잠재우는 일만 잘하면 육아의 첫날밤은 성공이다. 기분 좋게 아침에 일어날 기대를 품고 웃기는 말과 몸짓 발짓으로 아양 떨며 목욕을 시킨다. 입에 발린 칭찬과 제스처의 오두방정에 얼떨결에 깔깔거리며 목욕을 마친 손녀 둘을 차례로 타올로 싸안고 비행기 날아가듯 방으로 왔다. 그리고 로션을 바르고 잠옷까지 입히고 침대에 오르게 했다.

밀려오는 피곤을 마지막 남은 고비라 위로하며 “어떤 책을 읽을까?” 손녀들에게 질문했다.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둘은 경쟁하듯 침대를 뛰어 내려가 각기 다른 pout pout fish 3권씩을 가지고 온다. 아불싸! 이렇게 많이? 가지고 온 책 중에 하나씩만 읽자고 설득을 했다. 하지만 둘은 합창하듯 차갑게 ‘NO’로 거절을 한다. 절충의 새싹을 아예 잘라 버리려는 듯. 그리곤 양쪽에 비스듬히 누워 내 입을 바라보며 책 읽기를 기다린다. 난 체념하고 때로는 높은 톤으로 때로는 낮고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성우가 된 듯 낭독을 한다. 고단함이 사라져 버리고 새로운 기운이 솟는다. 이때다. 큰 손녀가 책 읽기 중단을 시킨다. 발음이 틀렸다 지적하면서. 그리곤 따라 하라는 듯 눈짓하며 시범을 보인다.

읽기가 중단된 사이로 피곤함이 헛웃음과 함께 밀려서 온다. 손녀를 선생님으로 여기고 발음을 따라 하고 또 하는데 의아해하며 고개를 가로젓고 또 젓는다. 결국 내 입을 관찰하며 트트트, 스스스 하며 입 모양과 혀 모양을 보인다. 근본부터 교정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였나 보다. 이때 지켜보던 작은 녀석도 언니를 도와 트트트 스스스 하며 가세를 한다. 영어로 말하기 시작한 지 겨우 서너 달 된 손녀들에게 발음 교정을 받으며 겸손하고 순수한 어린이의 연한 혀와 입술에 주신 능력에 신비로움을 느낀다.

할아버지의 무능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교정하기를 포기한 손녀들에게 난 다시 책을 읽는다. 읽기에 시동이 걸려 다시 열이 나는데 중단을 또 시키고 한 단어의 뜻을 묻는다. 처음 보는 듯한 단어지만 앞뒤 문맥을 감안해 짐작으로 얼버무려 대답했다. 이때 아리송한 눈빛으로 내 눈동자를 바라보는 손녀의 눈길에 기가 죽는다. 그리고 뇌가 화끈거림으로 어린이라 깔본 나를 지적질한다. 결국 내일은 사전을 찾아 확실히 뜻을 알고 읽을 작정 하며 머리를 식힌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책 읽기 끝을 내었다. 입과 목이 아프지만 후련한 마음으로 “이제 잠자는 시간” 했다. 한데 큰 녀석이 ‘NO’ 하며 동의하지 않는다. 작은 녀석도 덩달아 NO로 합세를 한다. 힘겹게 6권을 다 읽었는데 옛날이야기를 더 해 달라니! 망설이는 나에게 아빠도 그렇게 했단다. 할아버지는 책을 많이 읽어 입이 아프니 손녀에게 하라고 제안을 했다. 큰 손녀가 잠시 생각에 잠기다 ‘Once upen a time’ 하고는 선생님께 들은 것에 순간순간 새것을 지어 보태는 듯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수시로 숨 가쁜 듯 침을 삼키고 더듬거리며.

끝이 무엇인지 모르게 이야기를 마친 손녀는 할아버지 차례라며 내 입을 바라다본다. 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연다. “하나님을 모르는 골리앗 장군이 있었지. 무척 크고 힘센 사람이었어. 이 사람이 하나님 잘 섬기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거야. 하지만 대적하여 싸울 사람이 없었어. 모두가 벌벌 떨고만 있었지. 어떻게 해, 어떻게 해 하면서. 이때 어린 다윗이 나타나 내가 하나님 이름을 모욕하는 사람을 상대해 싸우겠다. 그리고 골리앗 앞으로 나왔어. 그러니 골리앗이 너 같은 꼬마가 나를? 하며 비웃는 거야. 이때 다윗이 돌을 주워 골리앗 이마를 향해 힘차게 던젔어. 돌은 골리앗 이마를 향해 날아가 ‘땅’ 하고 명중을 했지. 골리앗은 ‘쿵’ 하고 쓰러져 다리를 버둥거리는 거야.” 나는 누워 다리를 쳐들고 버둥거리며 쓰러진 골리앗 흉내를 낸다. 손녀 둘도 깔깔거리며 행복하게 누워 모두가 다리를 버둥거린다.

긴장되었던 위기의 순간을 벗어난 통쾌함이 행복하게 하는가 보다. 순간 또 다른 요구를 생각해 낼 겨를이 없도록 난 재빠르게 “누가 불을 끌까?” 질문했다. 둘이 동시에 용수철 튀듯 침대에서 튀어 나간다. 한데 불을 끈 큰 손녀는 침대로 올라와 이불을 덮고 잘 준비를 하는데 끄지 못한 막내가 운다. 일어나 침대를 내려가 안고 올라와 다독이며 “이제는 기도하는 시간”’ 하니 잠잠해진다. “예수님. 오늘도 건강하게 우리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 아빠 출장 잘 다녀오게 해 주시고 오늘 밤 좋은 꿈 꾸고 내일 아침 일어나 학교 잘 가게 해 주세요. 그리고 이안이 유안이 잘 자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복한 인물들이 되게 해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 소리를 들으며 큰 녀석이 질문이 또 이는가 보다. 죽으면 어떻게 돼? “예수님에게로 가지” 대답하니 “예수님은 어디에 계셔?” 묻는다. “내 마음속에 계시지. 거짓말하면 ‘아니잖아’ 그러며 얼굴이 빨개지게 하기도 콧등에 땀도 나게 하면서.” 손녀가 거짓을 말할 때의 경험을 복기하는 가 보다. 고요한 시간이 흐르는데 작은 손녀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잠이 들었다.

기회를 놓칠세라 “할아버지도 졸려” 하고는 코 고는 소리를 내며 잠든 척 연극을 한다. 큰 손녀는 할아버지를 거듭 부르고 귀와 코와 입술을 만지다 포기하고 돌아눕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두 귀요미들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평화롭게 들린다. 아! 첫날밤의 임무가 이제야 끝났다. 자유의 좋음이 이렇게 실감 나게 느껴진 적이 있을까? 한데 곤히 자는 귀여운 손녀들의 얼굴을 만지며 다시 깨우고 싶다.

내 침실로 돌아와 잠을 청하려는데 머리가 말똥말똥해진다. 목회의 수고가 의미 없이 느껴져 외로웠던 때가 떠 오르며. 비위를 맞추고 달래며 가족 돌 볼 겨를도 없이 희생하며 헌신했지만, 생명력에서 나오는 열매가 보이지 않아. 지금 하는 나의 수고는 돌봄일까? 육아일까? 돌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생명을 주신 분의 의도에 따른 육아를 하고 싶은데. 읽었던 육아의 서적들의 가르침을 하나도 실천한 것이 없다. 순간순간의 상황에 맞는 꾀만 사용하며 위기만 넘겨 돌봄만 했을 뿐. 4살과 5살 손녀 둘을 귀엽고 재롱 덩어리로만 생각하고 허락한 일인데 만만치 않다.

인내와 이해와 화를 넘나들며 수시로 변하는 감정 조절을 하느라 들숨과 날숨을 수시로 쉬면서 생명력 있는 육아를 과연 할 수 있을까? 질문이 인다. 고도로 발전한 과학을 등에 업은 유혹과 거짓으로 혼돈스러운 시대에. 천한 인생, 있으나 마나 한 인생, 없었으면 더 좋을 인생, 존귀한 인생 중 어느 하나가 되어 살게 될 텐데,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한 최선이 될까?

인간은 정신과 생각과 실력과 평상의 습관을 모아 존재의 집을 만들고 그곳에서 나오는 언어에 따라 미래를 만든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부른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고, 세상을 창조한 것처럼 나의 말 하나하나가 쌓여 삶의 가치와 행복이 달라질 테고.

다시 ‘내일 아침 일찍 깨우는 일은 잘 될까?’ ‘유치원 보낼 때 입고 갈 옷은 잘 골라 입힐 수 있을까?’ ‘운전 중 피피나 푸푸를 한다면 어떻게 할까?’ 염려가 이는데 내일 일은 내일 저절로 내 존재의 집에서 튀어나올 자연스러운 공감의 언어와 지혜에 맡기기로 하고 잠을 청한다. 결국 육아는 내 영혼과 소통하기를 원하는 분에 의해 존재의 집을 잘 짓고 이곳에서 나오는 언어에서 그분의 지혜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최선임이 새로워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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