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서](21) 믿음으로 현실을 밟아라. 기적이 일어난다.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믿음으로 현실을 밟아라. 기적이 일어난다.
믿음으로 기적을 경험하는 장면은 성경에 많다. 그중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릴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여호수아 3장이다.
여호수아 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번째로 가나안 앞에 선다. 40년 전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는 10:2라는 스코어로 약속의 땅을 포기했다. 여호수아, 갈렙 2명의 목소리는 10명의 소리에 묻혀 버리고, 그들은 40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보내야 했다.
이제 다시 약속의 땅 앞에 선다. 모든 것을 걸고 향했던 목적지가 앞에 보인다. 두려워 떨던 여호수아도 강하게 여호와를 의지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다.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에 입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길은 녹녹하지 않아 보인다. 부녀자와 어린이가 포함된 200만 명의 행렬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쉬어 보이지 않았다. 요단강은 작은 강이지만, 굴곡이 심하고, 급류와 소용돌이가 많은 위험한 강이다. 만약 처음부터 잘못되어 누군가 죽기라도 한다면, 약속의 땅 앞에서 또 한 번 좌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요단강에 들어선다. 제사장 먼저 요단강을 밟는다. 그런데 여기에는 눈에 띄는 한 단어가 있다. 바로 13절에 나오는 ‘발바닥’이다. 왜 발이라고 하지 않고 발바닥이라고 했을까? 발바닥은 맨땅에 전해주는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는 곳이다. 여러분 맨발로 자갈밭을 걷는다고 생각해 보라. 하다못해 건강에 좋다는 지압 판을 걷는다고 생각해 보라. 발바닥이 너무 아파서 1~2m도 걷기 힘들다. 그런데 성경에는 발바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현실을 피하지 말고, 현실을 밟으라는 것이다. 신발로 가리고, 마차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발바닥으로 디디고 서라는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친구들에게 숨어버리고, 믿음 좋은 척 기도원으로 사라져 버리지 말고, 현실의 문제 앞에 당당히 서라는 것이다.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수 3:14)’
그리고 말씀을 메라고 명령한다. 다시 말하면, 말씀에 순종하며 나를 가로막는 현실 앞에 당당히 서라는 것이다. 비록 말씀의 순종하는 것이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오더라도, 말씀의 무게 때문에 더욱 발바닥에 엄청난 고통이 느껴지더라도, 말씀을 붙들고 현실 앞에 당당히 서라는 것이다. 현실의 문제가 너무 고통스럽더라도, 말씀에 의지해서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사람에게 기적이 임한다는 말이다.
여호수아 1장 3절을 보자.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보이는가! 우리 발바닥으로 밟는 모든 곳을, 현실의 아픔을 느끼면서 ‘주여 당신 말씀만 의지하고 한 걸음 한 걸음 걷습니다. 너무 아파도 걷습니다.’ 때론 ‘급류가 너무 심해서 쓰러질 것 같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발바닥으로 걸어가는 그곳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현실이 아프다고 걷기를 포기하겠는가? 현실이 나를 쓰러뜨린다고 말씀을 버리고 가겠는가? 아니다, 더 걷는 만큼 주신다면, 더 해야 하지 않는가? 아프다고 포기할 것인가? 아니다. 그 아픔을 딛고 걷는 당신의 그 길을 주님이 축복하시고, 당신에게 주신다. 더 걸어라.
믿음으로 말씀 붙들고, 요단강에 발을 담그고, 발바닥의 고통을 느끼면서 서 있는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일하신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살펴보자. 하나님이 요단강 물을 가르신다. 그러나 홍해 때와는 완전히 방식이 다르다. 홍해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발을 담그기도 전에 길이 보였다. 그런데 요단강은 발을 담그니 갈라진다.
그런데 믿음으로 발을 담그자마자 바로 물이 갈라지고 길이 보였을까? ‘하나님 홍해 때는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홍해를 먼저 갈라 주셨지만, 이번에는 믿음이 조금 자랐으니, 우리가 먼저 발을 담급니다. 요단강을 갈라 주세요’ 이렇게 해서 믿음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 바로 마른 길이 나타났을까?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발을 담그는 순간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요단강은 제사장들이 믿음으로 한걸음 발을 담갔지만, 즉시 갈라지지 않았다. 홍해 때와 달리 믿음으로 한걸음 걸었지만, 홍해 때보다도 못했다. 강물이 여전히 흘렀고, 거친 물줄기만 느낄 수 있었다.
요단강은 강폭은 좁지만, 강물이 빨라서, 그냥 건널 수 있는 강이 아니었다. 장마철 하천을 생각해 보라. 깊지 않고 폭이 좁다고 성큼성큼 들어갔다가는 큰일 난다. 제사장들이 요단강을 디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거친 물살만 지나갔으며, 그들은 언약궤를 지고 중심을 잡기 위해서 흔들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중심 잡기 힘든 상황에도 언약궤를 지켜야 하니 더 고통스런 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왜 바로 갈라지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상류에서부터 물이 멈추고 쌓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상류가 어딜까? 사르닷 아담이라는 곳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있던 곳에서 약 25km 떨어진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과 사르닷 아담 사이 약 25 km 사이의 모든 물이 다 흘러내려 가야 비로소 길이 보이는 것이었다. 거친 강물을 견뎌내면서 몇 시간을 그곳에 서 있어야 했다. 강에 발담 그고 몇 시간 있는 것이 뭐 어때서 할 사람도 있겠지만, 요단강은 물살이 빠른 강이다. 요단강의 유속이 보통의 강보다 빠른 시속 10km 정도라도 그것은 엄청난 것이다. 몸이 받는 고통은 태풍 앞에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만약 더 빠른 시속 20km라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급류 속에서 법궤를 매고 몇 시간여를 버텨야 했다. 육체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시간을 급류와 언약궤의 무게, 그리고 물속에서 흔들리는 몸처럼 흔들리는 마음과 싸우면서 보냈을 것이다. ‘이렇게 급류가 흐르는데, 하나님은 왜 물을 안 멈추는 거지, 믿음으로 현실을 이기고자 급류로 뛰어들었는데, 왜 물이 멈추지 않지, 하나님이 분명 약속하셨는데, 왜 급류가 흐르지……. ’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많다. 믿음으로 한걸음 걸었지만,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고, 믿음만 흔들리는 때가 있다. 믿음으로 시작했는데 망하고, 믿음으로 지원했는데 떨어지고, 믿음으로 뛰어들었는데 급류와 같은 호된 고난이 오고, 남들이 안가는 길 믿음으로 걸었는데 상처만 받고.
그러나 기억하라. 하나님이 상류에서 일하고 계신다. 엄청난 급류를 상류에서부터 막고 계신다. 조금만 인내하라. 나와 주님이 일하시는 사이의 현실만 다 흘러가면 된다. 비록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위에서부터 기적을 행하고 계신다. 당장은 요단강이라는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지만, 조금 후 마른 땅이 나온다. 그 마른 땅이 나올 때는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한 번에 건널 수 있는 상류 25km 전방부터 하류 끝까지 말라있는 엄청난 대로가 열린다. 한번 생각해 보라. 상류부터 하류까지 완전히 말라있는 엄청난 대로를.
지금 현실이 너무 힘들다고 포기하지 말라. 내가 밟는 모든 땅이 나에게 주어지고, 내가 견디는 그곳에 대로가 열린다. 비록 현실이 힘들더라도 말씀으로 그분 앞에 서고자 노력하라. 그럼 앞에서 그분이 다한다. 말씀에 순종하며 걸어가는 걸음이 너무 버겁다고 슬퍼하지 마라. 믿음으로 현실을 밟는 것이 너무 아프다고 포기하지 말라. 급류와 같은 세상 속에서 견디는 것이 힘들다고 급류에 몸을 던지지 말라. 넘어질 때마다 인생의 교훈을 하나씩 집어 들고 일어서는 사람이 성공자다. 만약 넘어지고 지쳐서 힘들더라도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나라. 그리고 주님이 나와 동행한다는 교훈을 발견하였다면, 당신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대로가 열리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오늘 다시 시작하라. 기적이 당신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