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Select Page

[무화과나무 아래서](19)
의심을 의심하라

<span style=" font: bold 0.8em Nanum Gothic, serif ; color: green;">[무화과나무 아래서](19)</span> </br><span style=" font: bold 0.5em Nanum Gothic, serif ; color: fuchsia;">의심을 의심하라 </span>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의심을 의심하라

목회자 생활이 아니더라도 나의 신앙을 바라보더라도 믿음과 의심을 매일 혹은 매 순간 오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의심이 일단 우리를 찾아오면 신앙생활이 힘들어지기도 한다. 때론 우울하고, 때로는 주님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볼까 하는 유혹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지면을 통해서 여러분에 묻고 싶다. 정말 의심이 믿음의 반대일까? 나는 믿음의 반대는 무관심이라고 생각한다. 무관심하면, 의심이건 논쟁이건 전혀 생기질 않기 때문이다. 반면 의심은 계속해서 질문하고 확인하려고 한다. 철학적 관점에서 의심은 믿고자 하는 간절함이다.

마치 이런 것이다. 너무도 가고 싶은 대학에 합격했을 때, 합격자 명단을 다시 보고 다시 보지 않는가! 왜 그럴까, 합격을 믿고 싶고, 합격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은 것 아닌가. 또 간절하게 바라던 소망이 이루어졌을 때 어떻게 하는가? ‘허벅지라도 꼬집어보겠다!’고 하지 않는가? 이것이 현실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나를 때리면서까지 의심하는 것 아닌가? 믿고 싶어서 의심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 싶었고 만지고 싶었다. 예수님도 도마의 그런 마음을 아셨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27절처럼 도마가 말하기도 전에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한 것이다. 이 순간을 그림으로 그린 17세기 화가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면, 도마의 손을 붙잡아 이끄시는 예수님의 손을 볼 수 있다. 왜 예수님은 만지도록 했을까? 도마에게 의심하지 말라고 그런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을 기억하라고 그런 것이다.

딸을 시집보내거나, 아들을 군대 보내 보신 분들을 알 것이다. 자녀들이 떠난 빈방을 보면서, 혹은 자녀들이 입고 다니던 옷가지나 지갑을 보면서 그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확인하게 된다. 특히 장정 소포가 압권이다. 군대 입대할 때 입고 갔던 옷들을 소포로 다시 집에 보내주는 것이다. 그것을 받은 어머니들은 전부 운다고 한다. 장정 소포를 받아 들 때 꼭 군대 간 아들이 안기는 느낌이란다. 왜 그럴까? 그 옷가지와 신발에 자녀들의 모습과 그들을 사랑한 흔적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있는 상처가 바로 우리를 사랑한 흔적이다. 우리 모두를 사랑해서 십자가에 당하신 고난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그래서 도마에게 만지도록 요청한 것이다. 내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었고, 고난을 당하였다. 너를 사랑해서 그 고통을 견뎠다. 이제 그 사랑을 기억하라. 바로 이 말이다. 만약 고난으로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다면, 의심이 생길 때마다 십자가를 생각하고 나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을 바로 보라. 그때가 그분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고, 우리 의심이 믿음으로 굳건하게 되는 때이다.

믿음과 의심의 문제에서 한 가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은 복되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도마와 예수님의 마지막 대화에 나온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예수님이 복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마가복음 5장의 팔복과 요한복음 20장뿐이다. 우리는 팔복만 기억하고 있지만, 아홉 번째 복이 있다. 그것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이다. 이 “복”은 헬라어의 ‘마카리오스’로 “행복하다”는 의미인데, 천국에서의 행복보다 이 땅에서의 행복을 더 강조하는 것이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이 땅에서도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누굴까? 힌트는 31절에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렇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믿는 사람이다. 말씀의 능력으로 믿음을 갖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2000년 전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사람 아닌가!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믿고 행하는 사람 아닌가! 이 복을 누릴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말씀을 믿고 그것에 따라서 사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폭풍이 불어온다 한들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말씀대로 행하실 주님을 기대함으로 바라보는 자다. 비록 고통 중에 의심이 생기더라도 그 고통 넘어 주님이 주시는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말씀대로 이루실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고통의 환경을 어렵게 보지 말고, 그 상황 속에서 의심으로 힘들어하지 마라.

많은 기독교 서적을 저술한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비참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가 고통당할 때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라는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진 그 순간, 필립 얀시는 한 사건을 기억하게 된다.

그는 2007년 2월, 교통사고로 척추뼈가 골절되는 사고를 당했다. 의사는 부러진 척추뼈가 동맥을 찌르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며 가족과의 마지막 통화를 권했다. 정말 안 좋은 상황이었다. 죽음이 그에게 엄청난 고통과 함께 밀려왔다. 고통과 두려움을 마주한 얀시에게 의사는 어떤 약도 주지 않았다. 하다못해 진통제조차 주지 않았다. 오히려 사지를 꼬집고 핀으로 찌르며 ‘아픕니까? 느껴집니까?’라고 묻기만 했다. 그가 ‘예!’ ‘예!’라고 답하면 ‘좋아요!’ ‘아주 좋아요’라고만 했다. 그런데 아픈 감각은 신경이 손상되지 않았다는 증거고, 의식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다. 고통은 몸이 성하다는 생명의 징후였던 것이다.

만약 삶에서 고통이 느껴진다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의심이 생긴다면 내가 믿고 싶다는 증거다. 환경과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2022년도에 펼쳐질 새로운 소망을 가져라. 다시 극복하라. 보이는 것을 의심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신뢰하라! 눈에 보이는 현실은 우릴 두렵게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은 우릴 위해서 지금도 일하신다.

미주침례신문 앱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