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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아래서 (12)]
당신이 부활하신 주님을 증명하라

<span style=" font: bold 0.8em Nanum Gothic, serif ; color: green;">[무화과나무 아래서 (12)]</span> </br><span style=" font: bold 0.5em Nanum Gothic, serif ; color: fuchsia;">당신이 부활하신 주님을 증명하라</span>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당신이 부활하신 주님을 증명하라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나 또한 그랬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쉬웠다. 왜? 나만 믿으면 되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그냥 교회 다니고 믿으면 되니까.

그러나 살아계신 예수님, 특별히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을 우리 삶에서 증명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 되어 버린다.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냐?’고 빈정거리기도 하고, 부활은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때로는 ‘부활했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니, 내 주먹이나, 내 머리나 내 운명을 믿겠다’고 윽박지르는 사람도 많다.

게다가 그런 부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명하는 것은 때로는 소귀에 경 읽기보다 더 불편한 일이 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소는 가만히 듣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신만의 논리로 우리 믿음을 흔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만의 논리를 펴는 사람들은 그 반기독교적인 논리가 굉장히 정교한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믿음만으로는 대화가 쉽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나도 세상 사람들의 논리 때문에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철저히 부서졌던 경험이 있다. 나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철학과 수업 중에는 신 존재 증명이라는 수업이 있다. 신의 존재를 믿지도, 성경을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더 나아가 그 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토론 수업이었다.

물론 신학교에도 신 존재 증명이라는 수업이 있지만, 전도사님들끼리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신학생들이 신이 없다고,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결론 내릴 수 없지 않은가! 신학교의 신 존재 증명 수업은 항상 하나님이 계시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조직신학 책 몇 권 읽고 말 좀 잘하는 교회 오빠 콘셉트는 교회에서만 통하는 것이었다. 철학과 수업은 달랐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그냥 한 종교의 경전쯤으로 치부되고, 애초에 기독교가 존재하기 위해서 기록된 글이기 때문에 논지의 근거로조차 삼을 수 없었다. 반드시 인과율에 따라서 증명되어야 하는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증명 방식을 따르다 보면 하나님은 고사하고 보편적인 신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만약 신앙에 근거한 신을 계속 주장할 경우 미신을 믿는 사람처럼 취급받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러다 보면 신앙이 없는 학우들을 설득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집요하고 날카로운 질문에 나의 믿음이 흔들리기 일쑤였다.

어떤 날은 수업을 끝내고 집에 왔는데도 그들의 질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논리 정연한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나의 믿음을 난도질하였다. 언제나 토론을 마치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하나님이지만 없는 것으로 결론 날 때가 많았다. 신앙으로는 믿고 있었지만, 이성으로는 신의 존재가 증명이 안 되는 어정쩡한 상태를 한동안 겪었다.

그리고 신조차 존재하지 않는데,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고, 인간의 죄를 위해서 죽고 다시 살아났다는 성경의 진리는 그리스 로마 신화 정도의 이야기가 되기 일쑤였다. 결국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을 세상 속에서 증명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이런 류의 토론은 자연스럽게 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외의 곳에서 부활하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방법을 발견하였다. 어떤 권사님 가정을 심방했을 때다. 권사님에게 어떻게 교회 다니게 되었냐고 물으니, 쫄딱 망한 조카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이야기인즉슨, 조카가 하던 사업이 완전히 망하게 되어 집과 가재도구가 압류되고, 조카네 식구들은 완전히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을 때 일이란다. 조카 가정이 혹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되고 실의 빠졌을 조카를 위로하려고 조카 집에 갔더니, 조카가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권사님은 속으로 ‘망했는데, 무슨 노래를 불러, 술 먹고 있나?’하고 생각하는데, 조카는 계속해서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하면서 노래를 이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무슨 노랜가 들어 보니, 예수 뭐뭐가 들어가는 노래였다고 한다. 완전히 망한 상황에서도 노래하는 조카가 이상했고, 그 조카가 노래하는 예수님을 알고 싶었다고 한다. 결국 망한 조카 때문에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고 간증하였다. 완전히 망한 조카의 찬양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을 증명한 것이다.

중년의 나이에 완전히 망해서 집마저 잃어버린 사람이 찬양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비록 지금은 망했지만, 가진 것이 없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서는 삶, 다시 찬양하는 삶, 다시 시작하는 삶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 계심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우리가 상황과 관계없이 주님을 높이고, 찬양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죽음마저 이기신 주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상에 증명하는 방법이다.

‘이름도 없이 봉사하는 김 집사님 보면, 예수님이 계신 것 같아요.’

‘찬양하는 최 권사님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어요’

‘고난 중에도 소망을 품는 당신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 같아요.’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말싸움과 논쟁은 필요 없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한 번의 행동이면 족하다.

그리스도를 닮은 행동 한 번에 세상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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