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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牧會斷想] 의심 너머에 있는 은혜를 맛보다

[목회단상 牧會斷想] 의심 너머에 있는 은혜를 맛보다

지준호 목사(헌츠빌 은퇴, 자유기고가)

“의심 너머에 있는 은혜를 맛보다”

평안과 여유와 감사가 넘쳐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머리가 커지며 평화와 여유와 감사가 사라져 버렸다. 논리와 이성이 머리를 지배하며 신앙의 방해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난 도둑고양이처럼 교회를 다녔다. 친구들이 교회 가는 나에게 “어디 가냐?” 물으면 “저-어기”라며 턱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그러곤 우울해져 고개를 타래 밀고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차며 걸었다. 미워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거짓말하며 교회를 가는 것이 남자가 여자 옷을 입고 다니는 것 같아서였다.

신앙의 불편함이 불평을 낳고 의심을 부채질했다. 왜 도둑놈, 사기꾼들이 이리도 많은데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전지전능하신 능력은 언제 쓰려는 것일까? 가난으로 힘겹게 사는 사람, 사고로 억울하게 다치고 죽는 사람, 젊어서 병든 사람을 왜 못 본 체하는 것일까? 선하고 정직한 이들이 오히려 억울한 일을 당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까? 왜, 에덴동산 중앙에 먹음직도, 보암직도 한 선악과나무를 심어 놓은 것일까? 그리고 먹지 말라고 명령한 것일까? 유혹에 넘어갈 줄 뻔히 알면서. 선악과를 따 먹은 죄가 단지 명령을 어긴 것 때문일까?

아리송함을 풀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었다. 책도 사 읽어 보았다. 하지만 답 대신 믿으라고만 했다. ‘의심은 사탄이 주는 것’이라 말하며…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만 하면 어떡하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 난 너무 하찮은 존재였었다.

도도히 흐르는 환경을 거스를 수 없어 믿기지 않는 것을 믿으려 종교 행위를 열심히 했다. 감정을 뜨겁게 하여 확신에 이르려 버둥거렸다. 기적을 보여주든지, 꿈에라도 나타나 ‘내가 살아 있다’는 한마디만이라도 들려달라고 열심히 기도했다. 하지만 신비한 기적 부스러기 같은 것도 없었다. 개꿈을 통해서라도 한번 나타나 주실 만도 하건만… 왜 어떤 사람에게는 나타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차별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 분명할 텐데…

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벌고 출세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이해할 수 없는 외로움이 찾아와 양 볼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래도 선한 일로 존재가치를 높이고 싶은 욕망이 실오라기처럼 남아 기도를 하였다. 난 하나님과 딜했다. 돈 벌고 출세해서 선한 일을 할 테니 내 욕망을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오히려 실패의 아픔을 안겨주었다. “차든지 덥든지 하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그때야 난 어느 것도 온전하게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다시 외로움 가운데 방황을 했다.

방황이 의심, 호기심, 궁금증을 부추겼다. 논리 없는 곳에서 의심이 발아되고 영혼을 성숙시키는 것일까? 질문하고 또 질문하며 논리가 인도하는 대로 따르며 빛으로 나가는 것을 알았다. 인간의 언어로 소통할 수 없는 진리와 사랑에 대해 문학을 동원해 소통하는 성서가 보였다. 그리고 생존과 선한 가치와 쾌락의 욕망을 모두 품은 나의 내면을 드러내었다. 진리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도 보였다. 비로소 말씀을 읽으며 사랑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사소하고 시시한 작은 것들의 모임인 것도 보였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성격과 능력이 남들과 다르고, 생명의 신비를 품고 자라며 나만의 ‘아비투스’가 형성된 것이 보였다.

이 같은 인간과 세상을 이끄는 사랑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 가운데 낯선 인생이 되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알베르트 까뮈는 ‘뫼르소’를 통해 평생 ‘이방인’처럼 살다 사형수가 되는 어리석은 인간상을 그린 것 아닐까? 난 나와 관계 맺은 사람들과 사회를 온전히 알 수 없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상대하는 이들 모두가 아주 사소한 것으로 형성된 고유한 성품과 ‘아비투스’에 의해 형성된 고유함을 이해하려 했다. 그리고 그에 맞는 진리와 사랑의 말을 하려고 했다. 온전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사랑이라 여기고.

의심과 갈등과 방황 너머에 있는 빛으로 나가는 환희가 느껴졌다. 선이 악이 될 수도, 악이 선이 될 수 있는 것이 보였다. 선과 악을 판단하며 하나님 자리에 앉는 교만의 실체가 보였다.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심은 뜻이 비로소 보였다. 막힌 귀가 열리는 듯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며 나를 깨우치며 인도하시는 것을 그때 알았다. 잃었던 평안을 다시 찾았다. 내가 서야 할 자리, 말해야 할 것, 생명을 걸고 행동해야 할 일들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내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리며 칭찬하며 용기를 주는 듯했다. “사랑과 진리 안에서 누리는 신앙의 맛을 이제야 맛보는군” 하면서. “서로 다른 컴퓨터가 ‘프로토콜’로 하나 되는 것처럼, 상황 속에 있는 진리를 발견하고 그에 맞는 사랑의 언어를 찾아 사용할 때 하나님과 하나 됨을 누리지. 그리고 평화의 도구가, 진정한 친구가, 세상에서 유익한 존재가 되지” 하는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음성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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