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時論] 가짜 믿음
고등학교 때부터 잘 알던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친구 집안은 교회라고는 상관이 없는 집안이었다. 마침 사촌 형이 성당에 다녀서 신부(神父)가 와서 장례식을 집례한 모양이다. 그 친구는 ‘신부님이 오셔서 장례식을 인도했으니 우리 어머니는 좋은 곳에 가셨을 것’이라며 안위를 했다. 나는 그 어머니를 잘 알기에 차마 믿음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다만 대놓고 묻지는 못하고 속으로 ‘너희 어머니는 생전에 남에게 선행이라도 베푸신 분이니?’라고 묻고 싶었다. 물론 선행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러나 평생 선행의 수고도 없이 그저 신부가 장례식을 인도하니 좋은 곳에 가셨을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뻔뻔한 생각이 아닌가? 차라리 그 친구가 ‘우리 어머니는 그래도 생전에 착한 일은 정말 많이 하셨어… 그러니 좋은 곳에 가셨겠지?’ 이런 생각이 그래도 조금 더 바른 것 아닐까? 모친 상사로 인해 마음 아픈 친구의 허전함이라 여기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옆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던 젊은 청년들이 하는 이야기가 내 귀에 들렸다. “그래도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보험을 드는 것처럼 말이야… 혹시 천국이 있다면 가게 될지 모르니까…” 그러자 다른 청년이 물었다. “그럼 너 교회에 다닐 거니?” “교회는 왜 나가니?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야?” 나는 속으로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들 보험료는 안 내니?”
오늘날 ‘믿음이 없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거나, 그냥 믿는다고 치고 구원을 주십사…’하는 사상이 팽배하고 있다. 즉, 믿음의 고백과 그에 따른 행동에 대한 책임의식을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많은 성도들이 해이해지고 있다. 목회자들은 이런 세태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대처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어렵거나 복잡한 것이 아니고 단순하다. 오직 구원은 예수 안에 있으며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 4:12>) 예수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얻는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 10:13>) 그리고 믿는 자들은 주님께 충성하며 평생 이웃에게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 4:2>,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고후 8:21>)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다 가짜이다.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진 자들을 찾기 어려운 세상이다. 성도들이 조심해야 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