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회 목사의 삶, 안목, 리더십] Fundraising
유교 세계에서 태어나 성인이 되기까지 살아서 그런지 미국에 온 지 30년이 지났지만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쩐지 불편하다. 마땅히 주고받아야 할 돈을 주고받는데도 현찰이 오고 갈 때는 우리 한국인은 굳이 돈을 봉투에 넣어 상대방에게 건네어 준다. 거의 모든 한국인이 돈을 대하는 태도가 이런 식이라면 영적 사역을 하는 목회자는 더욱더 돈에 대해 이야기하고 돈을 다루는 것이 조심스럽고 쑥스럽다. 극우 경건주의자는 돈이 무슨 교회와 사역을 망치는 악의 뿌리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실상 돈이 갖은 윤리적 가치는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니다. 돈의 윤리적 가치는 중립이다. 성경은 돈이 (윤리적으로)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 전반절)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돈 그 자체가 악한 것이라면 교회는 헌금도 걷으면 안 된다. 악한 돈이 교회를 오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의 윤리성은 돈 그 자체에 있기보다 돈을 버는 방법과 그 돈의 용도에 있다.
교회에 돈이 없으면 사역을 감당할 수도 교회를 유지할 수도 없다. 선교단체에 돈이 없으면 선교는 어림없는 일이다. 우리가 목회자와 선교사로 부름 받았다면 마땅히 사역을 위해 돈을 만들 수 있는 리더십을 개발해야 한다. 헌금을 요구하는 설교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면 깨끗한 목사가 아니라 직무를 유기한 목사이다. 다른 사람에게 부담주기 싫어 교회와 개인에게 선교헌금을 요청해 본 적이 없는 선교사라면 어떻게 문화가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할 배짱과 기술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선교사를 포함한 많은 복음의 사역자들이 이런 사고로 펀드레이징에 임한다. “자신이 어렵게 번 돈을 내어놓지 않으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내어놓지 않으려는 사람을 설득시켜 사역비를 받아야 하니 펀드레이징이야 말로 가장 떨리고, 힘든 일이다. 일종의 필요악이라 할까?” 이제껏 이런 전제를 가지고 펀드레이징에 임했다면 오늘부터 펀드레이징에 대한 새로운 눈, 새로운 전제를 갖고 2018년 사역에 임했으면 한다. 우리가 가져야 할 전제는 이것이다. “인간은 누구라도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에 적으나마 자신이 갖은 재화를 내어 놓으려고 한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하는 사역이 상대방이 기꺼이 투자할 가치가 있는 바로 그 사역인 것을 설득하는 일이다.” 만일 상대가 설득되지 않았다면 조금도 망신스럽게 생각하지 말라. 그가 당신을 반대하는 것도, 공격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는 설득되지 않았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당신 사역의 파트너로 주님이 주신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냥 감사하고 지나가면 된다. 얼굴을 붉히고 모멸감을 느낀다면 당신은 리더가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고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절대 리더가 될 수 없다. 왜 나는 망신도 당하면 안 되고, 오해도 당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모멸감을 느꼈을 때 아무 일 없다는 듯 털어버리고 웃으며 앞으로 나갈 수 없다면 결코 리더가 아니다.
많은 경우 선교사들이 자신의 사역과 가족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어 펀드레이징에 임한다. 초점이 여기에 있으면 펀드를 내어 놓아야 할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왜 당신 사역과 당신 가족의 필요가 나의 생활과 내 가족의 필요보다 앞서야 하는가? 후원자가 알고 싶은 것은 필요가 아닌 가치와 해결책이다. “자금이 없어 일을 못합니다. 돈을 보내어 주십시오”라는 호소보다 “이 꿈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완성됩니다. 당신과 내가 힘을 합치면 능히 이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가 후원자가 듣고 싶은 메시지이다. “나의 사역이 자금이 없어 일을 할 수 없다”는 식의 문제 위주의 펀드레이징만 한다면 지혜로운 투자자는 절대 침몰하는 배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광야에서 회막을 지었던 모세의 펀드레이징 결과는 이러했다: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출 35:21). 한 마디로 모세의 펀드레이징은 회중에게 감동을 주었다. 펀드레이징의 초점이 필요(need)에만 맞추어져 있으면 감동을 줄 수 없다. 공동의 꿈, 고귀한 가치, 또 내가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 충분히 상태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일깨워주는 메시지—이런 것들은 감동을 가져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