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사모의 [진리와 하나된 교육] – 2 “샬롬을 이루는 교실”
“샬롬을 이루는 교실 ”
학군의 스케줄에 따라 다르지만, 이맘때가 되면 벌써 많은 학교가 새 학기를 맞이했거나, 곧 새 학기를 시작한다. 이제 1학년이 된 필자의 쌍둥이 두 딸도 새로운 학기를 맞이하는 기대감으로 들떠 있다. 며칠 전, 1학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자신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더불어 학급 운영에 대한 교사의 비전과 소망의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시편 27편 4절의 말씀을 교실 안에서 실현하기를 원한다는 담임 선생님의 편지를 읽으며, 딸들이 다니는 학교의 각 학급이 하나님의 진리와 경건 위에 세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편지 한 장에 묻어나는 학교와 교실의 분위기를 상상하니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고 기대감이 생겼다.
그러면서 연일 미디어를 통해 대한민국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뉴스를 접하며 안타까움을 넘어서 비참함을 느꼈다. 젊은 교사가 자신이 교실 한쪽에 만든 ‘마음해결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그곳의 교실이 가져다주는 영적인 분위기가 충분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분위기’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어떤 장소와 상황, 장면이 거기 있거나 그것을 대하는 사람에게 일으키는 어떤 느낌 또는, 어떤 개인이 주위 사람들에게 느끼게 하는 특별한 느낌이라고 정의한다. 즉, 분위기란 시공간이 가진 복잡한 현상이자 삶을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겠다.
교실의 디자인과 제공되는 교육과정에 따라 교실의 분위기는 다른 학습의 분위기를 만들지만, 실제적으로 교실은 그 안에 존재하는 교사와 학생, 그리고 부모에 의하여 교실의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교실은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으로서, 각기 독특한 성향의 사람이 만들어내는 교실의 분위기는 교육적 의미를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교사와 특정 학생 또는 다수의 학생에 의해 만들어지는 교실의 분위기가 교육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고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교실에서 발생하는 모든 순간은 교육적 상황으로 연결되며, 이것은 교실의 분위기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안정되고 지지적인 분위기의 교실은 교사와 학생 모두가 내면의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며, 교사와 학생, 교사와 학부모, 학생과 학생 사이에 존중의 분위기가 확립된 교실은 조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될 것이다. 따라서 질서와 조화 그리고 존중이 있는 교실의 분위기는 기독교적 가르침인 ‘샬롬’의 교육적 의미를 실천해 보는 가르침과 배움의 공간이 될 수 있다.
‘샬롬’은 신학적으로 전쟁의 위험이나 신체적인 박해가 없는 평안과 내면적인 안정을 모두 포함한 의미로서 하나님의 정의, 질서, 조화가 이루어진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의미의 ‘샬롬’을 교실에 접목해 본다면, 교실은 서로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태도를 가르치는 평안과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을 둔 윤리적, 도덕적 질서를 배우는 공간이 되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가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샬롬을 실천하는 교육은 비단 학교 교실만이 아니라, 교회학교의 교실과 각 가정에도 동일하게 적용해 볼 수 있다.)
교실은 단순히 지식 전달의 가르침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삶의 숨결이 있는 묻어나는 공간이다. 우리 자녀들이 머무는 학교의 교실이 폭력과 무질서로 물든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를 위해 교회와 가정은 학교의 각 교실이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의 분위기로 채워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부모는 매일 아침, 등교하는 자녀들을 향해 민수기 6장 24~26절의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의 메시지를 선포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샬롬’의 의미를 가르치고 자녀들이 생활하는 그 교실 안에서 그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의 메신저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자녀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해 주는 부모가 되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키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수기 6장 24-2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