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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관 목사의 목회의 길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 

[이수관 목사의 목회의 길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 

이수관 목사 – 휴스턴 서울교회(미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 

QT 중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관한 부분을 묵상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에게 의문을 주는 구절이기에 한 번 나누어 봅니다. 저에게도 이 대목은 오랫동안 이해가 되지 않던 구절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들의 잘못이 죽을 만큼 큰 것이었을까? 자기 재산을 팔아서 기부하려고 할 때 아까운 생각이 드는 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을 것이고, 나였더라도 분명 일부는 떼어 놓았을 것인데, 그게 죽을 정도의 죄인가? 세상에 다른 흉악한 죄들도 많은데 그런 모든 죄악에 잠잠히 계신 하나님께서 왜 이 사람들에게는 이토록 엄중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설명은 이러합니다. 일단의 그들의 의도가 안 좋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웃의 필요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칭찬받는 바나바를 보면서 질투가 느껴져서 본인들도 자랑하고 싶어서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강요된 행동이 아니므로 얼마를 떼어놓아도 누가 하나 뭐라 할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속이려 든 것은 그들의 선행이 위선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엄중함의 또 다른 이유는 무엇보다도 당시의 상황이 특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는 하나님께서 큰일을 일으키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옛 질서가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 질서가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 성령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는데, 즉 하나님이 움직이고 계신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을 속이려고 들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1-32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이런 각도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우리와 하나님은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죄의 경중에 대해서도, 처벌의 경중에 대해서도 하나님과 우리는 눈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무거운 죄라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의외로 잠잠하십니다. 예수님은 살인자를 보고도 그가 예수님께 기대는 순간 천국에 있을 거라고 했고, 창녀나 간음한 자나 세리나 누구도 정죄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우리가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에 분노하셨지요. 

하나님은 어떻게 그렇게 큰 죄들을 그렇게 쉽게 용서하시는 걸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죄 된 행동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즉, 살인이고, 간음이고, 무엇이든 간에 죄 된 행동은 우리가 그 사람과 똑같은 상황을 경험한다면 어쩌면 다르지 않게 행동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 사람과 같은 상황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받고, 그가 경험한 똑같은 상황에 내몰린다면 우리도 똑같이 행동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는 운이 좋아서 그보다 훨씬 나은 상황에 있다는 것을 잊고 어찌 그럴 수 있냐고 놀라워하는 것이지요. 

거기에 비해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 것은 언제나 행동이 아니고 마음인 것 같습니다. 교만하고, 미워하고, 잘못되기를 바라고 음모를 꾸미고,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리는 음흉한 마음을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그에 비해 순종의 마음,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 용서받고자 하는 마음, 화해의 마음, 이런 순수하고 가난한 마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도 우리가 의로운 행동으로 그분의 마음을 샀기 때문이 아니라 용서받고자 하는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내미신 손을 붙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의 기준으로 정죄하는 것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내가 정죄하고 있는 그 사람의 행동보다 정죄하고 있는 내 마음을 더 불편해하실지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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