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Select Page

[무화과나무 아래서](30) 사랑에 굶주린 ‘러브 푸어’ 

[무화과나무 아래서](30)  사랑에 굶주린 ‘러브 푸어’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사랑에 굶주린 ‘러브 푸어’ 

오래전 어르신들을 모시고 야외 예배를 다녀오면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어르신들이 거의 찬양으로 부르는 애창곡이 있었다. 너무도 열정적으로 불러서 종교성까지 갖고 경외감마저 드는 노래였다.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이 대목에서 정체불명의 영성을 느꼈다.)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어느 날 우연히 거울 속에 비춰진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세월아 비켜라(여기서 강렬한 믿음과 소망을 발견했다.) 

내 나이가 어때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것이 우리다. 그래서 사랑의 애절함이 없는 노래가 없고, 사랑 소설이 항상 베스트셀러다. 불륜이건 청순한 사랑이건, 목숨 거는 사랑이건, 사랑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드라마가 없다. 하다못해 예능 프로그램을 보더라도 ‘러브 라인’은 꼭 생긴다. 

어쩌면 우리내 인생은 사랑 타령이 전부인 듯하다. 그런데 노래도, 드라마도, 영화도, 사랑 사랑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사랑해서 기쁘다는 사람을 만나기는 힘들다. 노래방에 가서 노랠 불러도 95%가 사랑의 아픔과 이별의 슬픔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 사랑해서 기쁜 사람보다, 아프다는 사람이 훨씬 많다. ‘이놈의 사랑 이러면서 살아간다’ 매일 사랑 타령하고, 사랑 노래를 듣고, 드라마를 보면서도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고 외로워한다. 사랑보다는 외로움에 더 가까운 삶이 우리의 삶이다. 

홍수 중에 먹을 물이 없다는 말처럼 사랑 타령은 넘쳐나는데 사랑하지 못한다. 부부간에도 그렇고,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우리는 러브 푸어다. 하우스 푸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러브 푸어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보고, 사랑을 듣지만,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다. 주일 광고에서 ‘사랑합시다’를 늘 외치고, 찬양으로 몇 번씩 ‘사랑합니다’를 노래해도 우리는 늘 외롭고 사랑에 굶주려 있다. 

사랑의 홍수 속에서 러브 푸어로 살아간다. 사랑이 넘쳐나서 공해같이 느껴져도 영화 같은 진솔한 사랑을 갈망한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사랑해’라고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사랑받기만 원하고, 자기만 사랑해 주기를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가족조차 사랑하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지만,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이 당신과 나의 러브 스토리이고 우리 사랑의 현주소다. 사랑받기를 갈망하면서도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부러워하면서도 사랑하기를 두려워하고, 외로움 속에서 절망하고 있는 것이 우리 모습이다. 우리를 다시 세워주고, 우리로 다시 살게 하는 진정한 사랑을 잊었다. 아니, 그런 사랑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산다. 자! 우리의 사랑을 회복하고, 다시 진짜 사랑부터 배우자. 

‘인터넷에 물어봐’ 대화 중에 논쟁거리가 생기거나 사실인지 소문인지를 확인할 때 으레 나오는 말이다. 요즘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람에게 묻기보다는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만은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 좋은 방법은 아니다. 한번 ‘사랑’ 혹은 ‘love’를 검색 포털 서비스에 쳐보라. 좋은 글귀도 나오지만, 민망한 사진들도 같이 튀어나온다. 뭐가 사랑이라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때가 많다. 

지폐감별사가 위조지폐를 가려내기 위해 받는 훈련은 온갖 종류의 위조지폐를 낱낱이 살펴보는 것이 아니란다. 매일 진짜 지폐를 보고 또 보고, 만지고 또 만지는 일이라고 한다. 진짜를 알면 가짜는 보인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진짜 사랑만 알면 된다. 

진짜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자. 그것이 진짜다. 너무도 많은 성경 구절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지만, 마태복음 20장 1~16절은 우리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포도원 일꾼에 대한 비유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부른다. 하루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아침, 점심, 저녁 3번 일꾼을 모집한다. 그런데 품삯을 줄 때는 아침에 온 사람이건, 저녁에 잠깐 왔던 사람이건 관계없이 전부 한 데나리온을 준다. 경제학자나 사장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할 것이다. 열심히 일한 사람은 많이 주고, 적게 일한 사람이 적게 받아 가는 것이 세상의 순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것이 맞는 방법이다. 일 잘하는 사람을 먼저 뽑고, 그다음에는 중간 사람을 뽑고, 마지막에는 허드렛일할 사람을 뽑고, 월급도 달리 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다르다. 일꾼들의 가정을 생각해 보라. 일 잘하는 사람이야 항상 돈을 잘 벌어 가겠지만, 못하거나 나이 든 일꾼은 항상 생계가 걱정일 것이다. 나도 20대 초반에 막노동한 적이 있다. 아침마다 인력 시장에 나가면, 현장에 일꾼을 배정하는 부장님이 있다. 그때 아침마다 그 부장님에게 잘 보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내가 힘도 세고, 기술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런데 나이 들고 일 못하는 일꾼들을 생각해 보라. 며칠째 계속 허탕을 치면, 집에서 기다릴 가족 생각에 너무도 미안하고, 나이 들고 일 못하는 내가 너무 한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한스러움을 아신다. 그래서 일 못하고, 부족한 이들에게도 동일한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세상 정의와 다르다. 하나님의 사랑도 세상의 사랑과 다르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 가치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단 하나에 집중하는 사랑이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모두를 뭉뚱그려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사랑이다. 일 못하는 한 사람도 사랑하고, 가난한 한 사람도 사랑하신다. 그리고 당신이 누구든, 뭘 했든 상관하지 않고, 당신만을 사랑한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목숨 걸고 모든 위험 부담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우리는 양 99마리가 더 중요하고, 한 마리 정도야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하나님은 다르다. 하나님은 양 99마리와 잃어버린 양 1마리를 경제적 논리로 풀지 않으신다. 그분은 사랑의 논리로 푼다. 한 영혼을 찾고자 밤새워 노력하는 것이 그분의 사랑이고, 당신을 위한 사랑이다. 그 사랑이 당신 한사람에게 집중하고 있다. 

때론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지전능함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분의 사랑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서 분명히 증명되었다. 세상은 Give & Take 사랑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자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는 손해 보는 사랑이다. 우리 부모님도 그렇지 않은가. 자녀들을 위해서 평생, 인생을 손해 본다. 배고파도 먹었다고 하고, 힘들어도 안 힘들다고 한다. 아파도 안 아프다고 한다, 왜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부모 사랑도 이런데, 하나님의 사랑이야 어떻겠는가! 더 크지 않겠는가? 

자 5월 가정의 달이다. 이 기간에 진정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사랑받고 있는 나로 살아가자. 그때 나의 부모도,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진정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번 5월은 진정한 사랑의 풍성함을 가정에서부터 누려보자. 

미주침례신문 앱 다운로드